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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Nov 13. 2021

자존감은 죽었다

2021.11.12

모든 것의 시작은 한 문장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읽어내려가다가 아래와 같은 문장을 만난 것이다.


진정한 자기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그 논리적인 왜곡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젊은이들을 옴진리교(또는 다른 컬트 종교)로 끌어들이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오바 다케시 씨가 이 책에서도 자주 지적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중학교 도덕 시간에 '자아'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이후 인생은 '진정한 자신'을 종국에 만나거나 완성하는 여정이라고 믿었고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답이 하나일리는 없고 사람마다 각기 다른 답이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질문의 답으로 '옴진리교'를 적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답이 아니라 질문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자기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그냥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고보니 이 질문이 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도덕 선생님이 잘 얘기해주었던가? 아니 애초에 답이 있긴 한건가? 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한편 나는 요즘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터무니없이 비대해진 건 아닐까라는 의문도 갖고 있었는데 그 두 의문이 겹쳐지자 약간 이성을 잃은 것 같다.

그리고 그 결과가 아래와 같다.


『셀피』윌 스토 지음(글 항아리 펴냄) : 구입.

『언더그라운드』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문학동네 펴냄) : 옴진리교 사건을 알아보기 위해 구입.

『언더그라운드2. 약속된 장소에서』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문학동네 펴냄) : 2권도 있길래 구입.

『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요시미 슌야 지음(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펴냄) : 옴진리교가 나타난 배경이 궁금해 구입.

『균형이라는 삶의 기술』이진우 지음(인플루엔셜 펴냄) : 왠지 지금 한국사회가 당시 일본과 비슷하지 않을까해서 구입.

『불공정사회』이진우 지음(휴머니스트 펴냄) : 책소개가 괜찮아서 구입.


위의 저 한문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모르고 살았을(그래도 아무 불편함 없었을) 책들을 잔뜩 구매해버렸다. 그리고 아직 어떤 책도 다 읽지 못한 이 시점에 이미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답 없는 질문 같은 것에 골몰하고 그러지 말자. 오컬트한 종교에 빠지거나 책값으로 가난해질 수 있다'.


전술하였듯이 사실 요즘 나는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굴려보곤 한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거나 미디어를 접하다보면 개인이 갖고 있는 성향이나 문제의 원인으로 자존감을 지목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제가 어려서부터 자존감이 낮아서' '나처럼 자존감 낮은 사람은...' '걔가 자존감이 낮아서 그래' 라거나 '걔는 자존감이 높잖아' '자존감 높은 사람은 그런 거에 별로 신경 안쓰더라' 이런 류의 이야기들.

이런 말들이 처음에는 수긍이 가다가도 언제부턴가 자존감이란 단어의 범용성에 대해서 자꾸 의문을 품게 되었다. 정말 다 자존감 때문이라고?


나는 내 세계에서 자존감과 자존심이 구분되어지던 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2014년 1월 스페인에서 같이 동행한 친구가 '자존심은 센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정말 대하기 어렵다' 라고 말했을 때 였다. 그 전까지 나는 자존심과 자존감을 명확히 구분하진 않았는데 그 말을 들은 후 둘이 다른 개념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꽤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두 단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건 내 기억이 맞다면 자존감이란 단어를 지금처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처럼 입에 붙은 단어는 아니었다.


여기까지 쓰고나니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언제부터 사용하게 된 단어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뉴스는 언어의 바다이니까 그 단어가 뉴스에 언제 처음 등장하는지 확인해보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네이버뉴스에서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시기를 확인해봤다(확실히 아직까지도 흥분해 있는 상태인 것 같다).



자존감은 1995년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그 해 기사 딱 한 개에서 언급된다. 네이버 뉴스는 1990년 뉴스부터 서비스를 하니까 1995년 이전에 자존감이란 단어는 적어도 국내 언론사에서는 쓰지 않았던 단어인 셈이다. 거칠게 말하면 우리나라 미디어에서 태어난지 아직 30년도 되지 않은 단어라고 할 수 있다(반면 '자존심'은 1990년에 이미 146개의 기사에서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1995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이 '나는 어려서부터 자존감이 없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1980년생이 '나는 어렸을때부터 자존감이 낮다고 많이 혼났다'라고 하는 것도 거짓말일 확률이 높다.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고 그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용기가 없었다' '부끄러움이 많았다' '어른들이 두려웠다' '주목 받는 것이 싫었다'와 같이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현상들이 '자존감'이란 단어의 등장 이후 모두 '자존감이 없었다'라고 퉁쳐지는 것은 역시 문제가 있다. 심지어 이 짧은 역사의 단어가 이제는 우리를 잠식하고 있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검색을 한 김에 2000년 이후 자존감 이란 단어를 언급한 기사가 몇 개나 되는지 세어봤다(네이버뉴스에서 1년 단위로 기간을 설정해서 검색을 하면 한 페이지에 10개의 기사를 보여준다. 50개씩 보여줬으면 한다. 사명감을 갖고 세지 않는 나로서는 힘들었다. 그래서 오차는 당연히 존재할 것이다).


2000년~2021년 10월까지 '자존감'으로 검색한 기사 수

이 표를 살펴보면 전년도에 비해 증가폭이 큰 2008년, 2014년, 2017년, 2018년이 가장 눈에 띈다. 2008년은 미국발 금융위기, 2014년은 세월호 참사, 2017년은 대통령 탄핵, 2018년은 미투 운동이 일어난 해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방향을 바꾼 역사적인 사건들이다. 단순 비교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이 표 안에서는 사회와 구성원들이 큰 충격을 받았을 때 자존감이란 단어는 더욱 흥행한다(코로나19가 벌어진 2020년에는 오히려 줄어든 것이 의아한 부분이긴 하다. 나는 이 헛된 노동을 하는 한편 흘깃흘깃 기사들을 확인해봤는데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영화 시사회, 제작발표회와 같은 행사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대외 행사들이 줄어든 것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라고 조심스레 추측을 해본다. '자존감'은 홍보 문구에 쓰기 좋은 단어니까).


사회에 엄청난 문제가 생겼고 그 충격이 개인까지 무너뜨린다. 그러면 어서 사회의 문제를 봉합하고 해결해야 할텐데 사람들은 거꾸로 자존감을 높이려고 한다.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자존감을 높여 해결하려고 한다. 내 자존감이 무너져서 세상이 나빠진 것이 아니다. 세상이 나빠져서 내 자존감이 무너진 것이다.


자신의 자존감을 높여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필요 이상으로 자신한테 집중하고 자아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답 없는 질문을 붙잡고 늘어지다보면 답을 알려줄 누군가를 만나고 싶게 된다. 그리고 맹신하게 된다. 설사 그게 그릇된 믿음일지라도. 1995년 옴진리교 사린가스테러를 일으킨 사람들은 엘리트에 가까운 인재들이다. 이들이 배움이나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스마트한 사람일수록 위험하다. 그렇다 우리 모두 위험하다.

자존감이란 단어는 모든 문제를 개인한테 집중시킨다. 자존감이 낮으면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자존감이 높으면 어떤 위기에도 끄떡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정말 그런 사람이 있나? 나는 어떤 순간에는 한 없이 자신이 초라해서 스스로에게 심한 말도 한다. 때로는 괜히 내가 괜찮은 사람 같고 사람들도 날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라는 이상한 생각도 한다. 내 자존감은 보합세라기보다 혼조세에 가깝다(이렇게 얘기하면 누군가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그게 다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 거예요"). 나만 그런건가?

아이러니한 것은 자존감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들의 자존감은 빠르게 깎여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어의 힘은 점점 더 비대해지고 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존감으로 깔때기하는 순간, 문제를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근원적인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자존감'은 태초부터 있던 근원적인 단어가 아니다. (적어도 네이버뉴스 검색에 따르면) 1995년에 국민일보 기사에 처음 등장하고 2008년이 되어서야 많이 쓰이기 시작하는 짧은 역사의 단어다.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존감은 타고나는 무엇이 아니다. 내 문제는 원죄가 아니다.


'다다다' 37화까지 업로드 하였다. 약간 그림을 그리는 것이 수월해졌다는 느낌이 들어서 에피소드에 오브제들을 그려 넣어 보고 있다. 커피머신, 캠핑카, 캠핑용품, 농구공, 등산가방 . 이런 시도들을 해보니 그리는 재미도 있고 컷이  풍성해진다(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팔로워가 늘진 않는  같다. 자존감이 떨어진다).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어서 요즘에는 블렌더로 3D모델링을 공부하고 있다. 매우 더디게 진행되어서 유감이지만 그래도 신기하다.  2015 노트북이  프로그램을 견뎌내 주는게...아니, 내가 이런 3D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에피소드를 업로드하면서 중간중간 이런 결과물들도 같이 업로드하려고 한다.


대야 아닙니다. 밥그릇입니다.

마이클 조던은 대학교 신입생이 되었다. 아직은 재능 뿐인 이 고교생이 훗날 농구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시절 만났던 감독, 친구, 가족들 덕분이라고 책은 확실히 밝히고 있다. 자존심, 자신감,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것만 같은 이 영웅도 주위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혼자서 설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 요즘 듣는 노래 : 치킨런(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

- 요즘 읽는 책 : 저 위의 책들.

- 요즘 마시는 것 : 이디야 따뜻한 아메리카노




























작가의 이전글 시나리오 쓰고 있네, 이 좌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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