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에 팔로워 수가 1,000명을 넘었다. 사실 100이란 숫자도 잘 가늠이 되지 않아서 1,000이라는 숫자는 더 상상하기 어렵다. 고등학교 때 한 반에 50명씩 20반까지 있었으니 그때의 한 학년 정도가 나의 팔로워라고 생각해 본다. 복도를 걸어가면 마주치는 아이들이 다 내 콘텐츠를 보고 있다(어? 너도 내 팔로워네, 반가워, 어, 너도? 하는 일이 계속 벌어진다. 흐뭇하다). 내 고등학교 시절 교류 범위는 반경 2m 안에 자리한 친구들 정도였으니 꽤 대단한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팔로워 수가 늘어나는 데는 여전히 광고가 대부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어느 단계에 올라야 광고 없이 팔로워 수가 꾸준히 증가하는지 궁금하다. 그런 지점이 어디쯤인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음. 있기는 할까?).
100회에 가까워지는 에피소드의 주된 원천은 평소에 하던 생각들과 책인데 요즘은 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반짝하고 나타나는 아이디어를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 안에 한 번 담갔다가 빼내서 에피소드를 만들고 있다. 담갔다가 바로 건져올리는 이야기도 있고, 담근 채로 묵혀두고 있는 이야기도 있다. 혼자 있거나 출퇴근 길에 그것들을 들여다보는 일이 즐겁다.
당연한 결과로 요즘도 책을 꾸준히 사고 있어서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이 꾸준히 쌓여가고 있다. 거기에 대해 특별한 스트레스는 없지만 가끔 구입한 이유를 잊은 책이 생겨서 곤란할 때가 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손끝으로 훑다가 어? 이런 책도 샀었네? 하며 머리를 갸우뚱하기도 한다. 많지 않은 수입을 쪼개서 샀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를 잊어버린다면 책으로서는 좀 서운한 일이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한 친구가 내가 같은 반이었다는 것이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주위의 다른 친구들이 지금과는 좀 달랐던 고등학교 때 내 모습(많이 말랐었다)을 묘사하며 설명해도 그 친구는 연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 친구와 몇 번 대화를 한 적이 없긴 했다(반경 2m 너머의 사람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친구가 노란색 나이키 로고가 그려진 회색 포스를 신고 있던 녀석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어서 내심 서운했다. 그리고 굳이 두 차례, 세 차례 나의 존재를 거듭 부정하는 녀석의 모습에 회색 포스를 뺏어서 저 멀리 던져버리고 싶기까지 했다(초면에 실례합니다라고 말하며).
딱 그만큼 서운할 것이다. 내 책으로서는.
그래서 그 책들의 독선감을 적어 그들을 달래보려고 한다. 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책장에서 떨어져 내 발 등을 찍는 일이 잃어나지 않도록. 아직 읽지 않은 책들(중 극히 일부)에 대한 감상을 남겨본다.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이영미 옮김, 문학동네)
출퇴근을 걸어서 하기 때문에 지하철을 탈 일이 별로 없다. 가끔 지하철을 탈 일이 생기면 미리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걱정하게 되는데 주로 서점에 들러 책을 사곤 한다. 지하철에서 읽을 책을 고를 때는 꽤 신중해야 하는데, 그 책 한 권으로 나에 대한 이름 모를 동승자들의 인상이 결정지어지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무엇을 읽는지를 아는 것만으로 꽤 많은 개인정보를 추측할 수 있다. 시집을 읽어서 독특한 아우라를 풍겨낼 수도 있겠지만 동승자들과 조화롭게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그들이 안심할 만한 책을 선정하는 것이 좋다. 그런 이유로 나는 대부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산다(동승자에 따라서는 나를 비웃을 수도 있다).
급히 지하철 탈 일이 생긴 어느 날, 서점에서 고른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가와카미 미에코의 인터뷰집『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에세이『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두 권이었다. 지하철에서 읽기 시작한 책은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였는데 지하철 타고 네 정거장 만에 책을 덮었다. 내 책상으로 돌아가서 이 책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싶어서. 너무 좋아서.
설레는 마음으로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의 표지를 만지작거리며 목적지까지 갔던 것 같다. 그때『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는 내 겨드랑이 사이에 잘 끼워져 있었다.
『선물 - 대가 없이 주고받는 일은 왜 중요한가』 루이스 하이드(전병근 옮김, 유유 출판사)
포털창에 매일 검색하는 단어들이 몇 개 있다. 주로 일과 관련된 것들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인데, 그중 하나가 바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다. 이제 그의 책이 국내에 거의 다 소개되었고 기다리고 있는 건 그의 대표작이자 문제작인 『Infinite Jest 무한의 재미』 의 출판 소식이다. 그 번역의 난이도로 인해 소문만 무성하고 언제 발간될지는 미지수다. 이런 책의 출판, 번역을 결정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독자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이런 분들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의 서가는 다채롭지 못할 것이다.
아무튼 그날도 어김없이 그의 이름을 검색하였고 뉴스 카테고리에 새로운 기사가 올라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루이스 하이드의 『선물』 이 출판되었다는 신간 소개 기사였는데 여기에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추천사가 실려있었다(그 외 마거릿 애트우드, 제프 다이어, 얀 마텔, 지넷 윈터슨 등등의 추천사들을 출판사에서 책의 앞뒤로 기재해 놓았으니 혹시 관심 있는 작가의 추천사가 있다면 읽어보시길). DFW의 작품 세계를 좀 더 이해하고 싶은 나로서는 이 책을 살 수밖에 없었다. 어떤 작품이 내가 좋아하는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을지를 확인하는 건 꽤 설레는 일이다. 이렇게 산 책이 두 권 더 있는데 아래와 같다. 모두 아직 읽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 『모든 것은 빛난다』 후버트 드레이퍼스, 숀 켈리(김동규 옮김, 사월의 책)
책 표지에 적혀 있듯이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가 주요 목적인 책인 듯한데 DFW에 관한 글도 실려있다. 책 51쪽에 이렇게 써져 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는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작가였고, 아마도 가장 위대한 정신일 것이다' . 에이, 이 정도인가 싶어서 책을 덮었고 아직까지 열지 않았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C.S. 루이스(김선형 옮김, 홍성사)
DFW가 꼽은 책 10권의 목록 중 하나에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이 첫 번째로 나오니 아마 그가 추천하는 첫 번째 책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이미 베스트셀러라서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혹시 출판사에서 판매량에 아쉬움이 있다면 앞뒤 표지에 이렇게 적어도 좋을 것이다. "DFW가 꼽은 최고의 책". 유유출판사는 그렇게 해서 적어도 한 권을 더 팔았다.
『비행기, 하마터면 그냥 탈 뻔 했어』 아라완 위파(전종훈 옮김, 보누스)
내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세상에는 현실을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물건들이 몇 가지 있다. 단순한 모양의 겉모습으로 시치미를 뚝 떼고 신기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들이 그러한데 예를들면 스마트폰, 라디오, 텔레비전, 비행기, CD와 같은 것들이다. 가끔 보면 인간은 꼭 필요한 것보다 더 신기한 걸 만드는 데 애를 쓰는 듯하다. 이런 것들을 애써 이해하기 위해 관련된 서적을 사거나 다큐멘터리를 보기도 하지만 다 보고 난 뒤에 드는 생각은 늘 이런 것이다. "아니, 그런 것 말고 좀 더 그럴듯한 진실을 얘기하란 말이야".
이 중의 으뜸은 역시 비행기인데, 비행기는 단순히 하늘을 나는 것만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갑자기 나타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기내식, 장거리 비행에도 내내 단정한 모습을 유지하는 승무원, 잠시 이별했다가 대부분 아무 일 없이 나타나는 캐리어 등 너무 비현실적인 것들 투성이다. 공항을 빠져나오면 일순간 멍해지는 것은 이 비현실적인 체험에 대한 후유증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기한 것들은 진짜 마법이 아니라 속내를 감춘 마술에 가깝다. 나를 이코노미 좌석에 앉혀 시야를 가린 채 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영원히 마법이라고 믿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 원리를 안다면 조금 더 여유 있게 마술사들의 쇼를 구경할 수 있겠지. 요즘처럼 픽션이 현실에 개입하는 시대에 이런 책들을 서둘러 읽어둬야겠다고 다짐하다가도 한쪽으로는 비행기 탈 일이 있으면 비행기에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외에도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이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만큼 더 있지만 쓰다 보니 점점 책 읽는 시간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적는다. 과연 그 책들을 다 읽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자신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독선감을 써놓고 보니 그 책을 사기까지 내가 했을 많은 생각들과 감정의 양이 적지 않아 보여 이미 그 책 나름의 역할을 다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면 책은 꿈을 닮아있다.
지금 당장 읽을 책은 아직도 다 읽지 못한 『마이클 조던』 이다.
읽고 있는 책 : 『나, 프랜 리보위츠』 『죽음이란 무엇인가』
마시고 있는 것 : 서촌 Ouvert 원두
듣고 있는 것 :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음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