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월 8일 일요일. 일주일 전, 해가 바뀌었다. 12월 31일에서 하루 지난 것뿐이지만 세상이 바뀐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얀 새 종이를 받은 느낌이랄까. 새 종이를 마주하기 전에 1년 동안 함께 했던 헌 종이를 바라보며 어떤 감상에 젖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개인적으로 2022년은 '뭐, 이만하면 괜찮았어'라고 말할 수 있는 해는 아니었다. 일어나지 않았었으면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약 10년 전쯤부터 연말에는 서점에서 내년도 다이어리를 한 권 산다. 날짜별로 한 페이지씩 되어 있는 데일리 다이어리를 쓰는데, 그걸 잡고 있으면 1년이라는 시간의 물성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다이어리 커버의 재질은 나에게 상당히 중요하다. 가끔 딱딱한 재질로 된 커버의 다이어리를 구입한 적이 있는데 손가락으로 커버를 쥘 때마다 마음이 경직되는 느낌이었다. 한 해 동안 다이어리를 쥐는 횟수가 결코 적지 않을 테니 내 마음에 축적된 경직성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다이어리가 내 한 해를 망쳐놓았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새 다이어리를 사기 위해 해가 빨리 바뀌었으면 하는 생각이 (잠깐이라도)들어선 좀 곤란할 것 같다.
내 다이어리 사용법은 이렇다. 우선 그날의 페이지를 펴고 가운데에 세로로 선을 죽 그어 반을 나눈다. 왼 편에는 오전에 계획한 일을 적고 하루를 마칠 때쯤 다시 펴서 오른 편에 그날 한 일을 적는다. 이때 괄호 안에 소요 시간을 함께 적는다(가령, (아직도 반도 못 읽은)『마이클 조던』을 한 시간 동안 읽었다면 '독서-마이클 조던(1.0)' 이라고 쓰는 식이다). 식사와 같은 일상적인 것은 적지 않고 계획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에 대해 기록한다. 간혹 하루에 대한 감상을 적긴 하지만 거의 쓰는 일이 없다.
이러한 방식은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를 읽은 뒤 시작했다. 나와 류비셰프의 차이는 나는 기록만 하고 끝이지만 류비셰프는 자신의 시간을 어디다 썼는지 통계를 냈다는 것이다. 평생의 시간을 계획하고 평가한 그는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70권의 학술 서적과 단행본 100권 분량에 달하는 연구 논문을 세상에 남겨 놓았다고 책은 전한다. 이 정도로 시간을 정복했다고 할만한가 의심스러울 수 있지만 그가 이 활동을 펼치면서 충분히 자고, 회사에 다니고, 가족, 동료, 후배들에게 충실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과연, 시간의 정복자로군.' 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나는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못했는데 잠도 부족하고 회사도 겨우 다니고 가족, 동료, 후배들에게 불성실하기 때문이다(물론 나는 한다고 하는데...).
아무튼 이 러시아의 시간정복자에 감응한 내가 매년 다이어리를 구입하고 어설프게나마 하루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다이어리를 처음 구입하면 아직 1월 1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쓸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분실했을 때를 대비해 이름이나 연락처 란에 내 정보를 노출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누군가가 들춰본 내 다이어리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혹시, 이 다이어리의 주인이신가요?'라고 내게 말을 거는 누군가를 상상할 때마다 왠지 의미심장하게 올라가있는 그 사람의 입꼬리도 같이 상상하게 된다. '아니요. 내 것이었지만, 내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무언가를 적고 싶은 마음은 누를 수 없다. 그래서 가끔 제일 앞장에 마치 소설가나 시인이 된 것 마냥 서문을 적곤 했다. 골똘히 생각해 보았자 생각나는 건 시간에 관한 흔한 아포리즘들. 그래도 그런 것들을 한 줄 정도 적고 나면 기분이 좋다. 이름이나 연락처보다 강력하게 내 것이라는 낙관을 눌러 찍은 느낌이 든다.
작년에 쓰던 다이어리에는 이런 서문이 적혀 있었다. '한 해가 지나서 한 살 더 먹기를'. 아포리즘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팬데믹 기간 중이라 생존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는지 이렇게 적어놓았다. 가장 당연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나는 한 해를 지냈고 한 살을 더 먹었다. 아쉬운 건 '한 해가 지나서 다 함께 한 살 더 먹기를'이라고 적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조차 몇 번 보지 않는 다이어리의 낙서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적을 걸 그랬다.
쉽지 않은 한 해 였지만 2022년은 '다다다'가 100회를 넘긴 해이다. 여러 가지 불안요소, 장애요소, 절망 요소를 극복하고 100회를 넘겼다는 것은 스스로 기념할 만한 일이다. '다다다'를 시작하며 작성해 본 OKR에는 한참 못 미치기에(2021년 4월에 작성한 OKR에는 이미 그해 4분기에 팔로워 5천 명을 달성하고 단행본 1권을 출판할 것으로 되어있다. OKR이란 그런 것이다) '잘했다' '대단하다' '수고했다'라고 자평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정도로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한다고 했다'.
이미 1월 둘째주 임에도 올해 다이어리에는 아직 서문이 비어있다. 조금 더 공을 들여 여기에 쓸말을 찾아내야겠다. 그렇게 올 한해를 제대로 시작해봐야겠다.
지금 읽고 있는 책 : 마이클 조던(롤랜드 레인즌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무라카미 하루키), 용서하다(자크 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