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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Jan 16. 2023

<더 퍼스트 슬램덩크> 리뷰

나약한 사람들을 위한 헌사


* 본 리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볼 생각 없었다.

<슬램덩크>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개봉된다는 소식을 듣고도 심드렁했다. 개봉 소식을 처음 접했던 작년, 친구들이 모인 단톡방에 관련 기사 링크를 올려봤지만 다들 별말이 없었다. <슬램덩크>는 너무 오래된 이야기고 <슬램덩크>의 TV애니메이션이 준 실망감을 나는 잊지 않았고(달려도 달려도 끝나지 않던 그 코트를 나는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농구 만화' 같은 것을 보기에 우리는 너무 커버렸다. 읽다가 멈춘 <나루토>의 완결도 궁금하지 않고 <원피스>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한 번 봐볼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은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이 애니메이션의 감독을 맡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이제 만화는 거의 보지 않지만 여전히 내가 모으고 있는 만화가 하나 있는데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휠체어 농구를 다룬 <리얼 REAL>이다(한국 기준 2001년에 단행본 1권이 출간된 이 만화는 1년에 한 권 씩 나오다가 14권 출간 후 6년만인 2022년에 15권이 발간되었다. 그리는 작가도 작가지만 이걸 기다리는 독자도 독자다). 예전 그의 인터뷰에서 <슬램덩크>의 속편 계획을 묻는 질문에 '당시처럼 <슬램덩크>를 뜨겁게 그릴 수 없을 것 같다'는 답변을 읽은 적이 있다(기억에 의지하는 것이라 정확하지 않은데 인터뷰 출처를 확인하게 되면 수정하겠습니다). 나는 이 말을 <슬램덩크>의 속편은 앞으로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작가의 말에 공감했다. 나 역시 가끔 집에 있는 <슬램덩크>를 다시 잡으면 재미있게 읽긴 하지만 군데군데 낯간지러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리얼>은 그런 부분들이 많이 배제되어 있는 농구만화이다. 캐릭터는 입체적이고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담겨져 있다(농구를 너무 사랑하는 만화가가 평생 동안 농구 만화를 그리고 싶어서 시작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이 애니메이션의 감독을 맡았다는 것은 <슬램덩크>도 <리얼>처럼 이야기해보겠다는 의지처럼 보였다. '예전처럼 뜨겁지는 않지만 좀 더 깊이 있는 시선을 독자들에게 보여줘도 되겠다, 작가가 성장한만큼 독자들도 성장했을테니'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북산 대 산왕' 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데 포커스는 '송태섭'에게 맞춰져 있다. 송태섭은 북산의 다섯 명 중 마땅한 수식어가 없는 캐릭터다. (자칭) 천재 강백호, 슈퍼루키 서태웅, 고릴라주장 채치수, 불꽃남자 정대만 등 뾰족한 성격(+외모)나 재능이 극대화된 네 명의 캐릭터와 달리 송태섭의 수식어는 빈칸으로 남겨져 있었다(한나가 No.1 가드 라고 써주긴 했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듯 No.1 가드는 이정환이다). 그래서인지 산왕전에서 송태섭의 존재감은 다른 네 명에 비해 희미하다(그래도 대단하지만).

원작에서 산왕전 후반, 선수들을 불러모은 안감독은 송태섭이 북산팀에 '스피드와 감성'을 주었다고 말한다. 스피드는 이해하지만 감성은 뭘까. 송태섭이 감성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나. 이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 좀 의아했었다. 작가의 스타일상 만일 '감성'이라는 것이 송태섭이라는 캐릭터의 장점이라면 짧지 않은 에피소드를 통해 독자들의 기억 속에 남게 했을텐데 내 기억에는 없었다. 여자한테 많이 차인 것을 말하는 건가? 라고 대충 눙치며(이게 왜 감성적인거지?) 페이지를 넘겼었다. 당시에는 어쨌든 강백호의 부상이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작가는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27년이 지나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들려주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는 원작에 쓰여지지 않은 송태섭의 전사가 펼쳐진다. 아버지를 잃고 얼마 뒤, 농구선수로서 동경하던 친형마저 죽자 송태섭의 방황이 시작된다. 강백호와 다투고 정대만과 충돌하는 문제아 송태섭에게는 사실 이와 같은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작가는 한발 더 나아가 송태섭의 내면 즉, 나약함을 관객들한테 보여준다. 이 애니메이션의 특별함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아플 때 아프다고 무서울 때 무섭다고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오히려 나약한 사람일수록 센 척한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허세를 부린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송태섭이 바로 그렇다. 언제나 여유있고 자신만만하던 송태섭의 모습이 사실은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허세였다는 것을 아는 순간 원작 만화가 다르게 읽힌다. 허세는 위선이고 거짓일텐데 신기하게도 그의 허세에 우리들이 깊이 공감하고 마음이 흔들린다. 송태섭은 북산 뿐만 아니라 이 작품 전체에 감성을 불어넣는 존재였다.


초고교급 선수들이 즐비한 <슬램덩크>의 세계에서 송태섭이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이 악물고 버티는 모습은 잘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지지 않으려고 센척하는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감정에 따라 거침없이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솔직하거나 덜 위선적인 사람이 아니라 강자의 위치에 서있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잠깐이라도 나약함을 보였다가는 이 세계에서 탈락되는 약자들은 필연적으로 강한 척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약자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다.

강자들 사이에서 버티고 있을 보통 사람들, 오늘도 두 다리에 힘주고 괜찮은 척하는 나약한 사람들을 조명한 영화라고 한다면 마지막 부분은 더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진짜 천재 정성우(맞나?)는 미국에서 시합을 준비하고 있다. 언론과의 인터뷰를 하는 그의 모습은 완성형 선수가 된 것처럼 보인다(아닌게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경험을 터득'하는 소원성취까지 했다). 이런 정우성을 매치업할 선수로 이노우에는 서태웅도, 강백호도 아닌 송태섭을 소환한다. 그리고 송태섭은 시합 전까지 화장실에서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지만 다시 한 번 이 악물고 코트에 서서 천재 정우성과 대등하게 마주한다. 대단한 사람들 속에서 한 없이 작아지지만 센 척하고 괜찮은 척하며 꿋꿋이 버텨 여기까지 살아온 우리들처럼. 이것이 27년을 기다려준 팬들을 향한 이노우에 작가의 선물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덧. 밸런스 게임 하나 해결 : 슬램덩크 vs 드래곤볼 / 슬램덩크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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