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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Mar 03. 2023

소공동을 기억하나요

2023. 3.2.목


얼마 전, 오후에 혼자 자유롭게 쓸 수 있는(집을 비워야 하는) 시간이 생겼다.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는 혼자 무엇을 할까 궁리를 하며 설레기도 했지만 막상 그 시간이 되니 아무런 계획도 준비되지 않았다. 누구와 약속을 잡지도 않았고 예매해 둔 영화나 전시회도 없었다. 결국 나가야 하는 오후 세시가 되자 나는 읽고 있던 책 두 권과 노트북을 가방 속에 대충 밀어 넣고 집을 나섰다(가방의 지퍼를 채우면서 그 책들을 밖에서 펼쳐 읽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가진 것 중에 가장 두툼한 점퍼를 입었음에도 집을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영리하게 빈틈을 파고 들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전혀 비유가 아닌 것이 일단 집을 나오면 갈림길을 마주하게 된다. 목적지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딱히 갈 곳이 없다면 계속해서 나타나는 갈림길에서 그나마 촉이 오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나의 촉이란 게 그다지 기특한 편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늘 갈림길에서 발을 멈추는 편이고 이번에도 아파트 정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좀 머물렀다. 머문 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뒤에 누가 오고 있지는 않나 자꾸 신경이 쓰였다.


목적지가 없다보니 발이 공중에서 붕붕 뜬다.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다보니 머리가 아파온다. 계속 이럴 순 없다. 어디든 목적지를 정해야 했다. 혹시 우연히 A라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럴듯하게 둘러댈 수 있는 곳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이 지점에서 나는 앞으로 길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면 행여 인사치레라도 "어디 가세요?"라고 묻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나는 걷는 동안 어디로 걸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목적 없는) 목적지를 설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었는데 우선 한 장소로 특정짓지 않기로 했다. 교보문고, 종각과 같은 특정한 랜드마크를 목적지로 삼았다가는 우연히 만난 A라는 사람이 동행이 되는 수가 있다(게다가 시내에서 우연히 만난 A라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달갑지 않은 상대일 것이다). 상대의 채근에 어디로든 도망갈 수 있도록 좀 벙벙하게 목적지를 잡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왕 나온 김에 평소에 잘 가보지 않았던 곳을 간다면 삶의 지평을 넓히는 시간이 될 것이라는 기특한 생각도 해봤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모든 일에 유익함을 부여하려는 내 자신이 전혀 기특하지 않아 최대한 무익한 시간이 되도록 목적지를 정하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무익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보니 역시 목적지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돌아오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 같아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곳을 가기로 했다. 마침 걷는 방향 그대로 쭉 가면 소공동이 나올 예정이었다. 소공동. 호텔과 백화점이 있는 이 곳에서 내가 할 일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A가 소공동을 갈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나는 그제서야 소공동 어디즈음을 목적지로 생각하고 천천히 걷기를 시작했다. 발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간만에 생긴 혼자만의 시간을 내내 목적 없는 목적지인 소공동을 향해 걷다가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그 길을 다시 떠올려보니 기억에 남는 건 추위와 겨울 특유의 무채색, 무표정의 사람들 뿐 별다른 건 없었다. 이만하면 꽤 무의미했다고 자평하며 긴 시간 수고한 기특한 발바닥을 문지르다가 나도 모르게 '내가 오늘 산책이란 걸 했구나'라고 중얼거렸다.


*사진은 소공동과 무관합니다.


              요즘 읽고 있는 책 :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나종호 지음),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존 르카레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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