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31. 금.
약 3년 전부터 사고 싶지만 아직 사지 않은 물건이 하나 있다.
바로 맥가이버칼인데, 틈틈이 인터넷쇼핑몰이나 유튜브를 보며 혹시 세상에서 사라지진 않았나 안부를 확인하고 있다. 내가 사기 전에 사라지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인데, 한편으로는 이 유서 깊은 물건이 사라진다면 그건 정말 큰일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흔히 우리가 맥가이버칼이라고 불리는 이 물건의 공식 명칭은 '스위스 아미 나이프(Swiss Army Knife)'인 듯하다(단언하지 못하는 건 이 물건의 제조사인 빅토리녹스의 홈페이지에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로 되어 있지만 다른 사이트에서는 '스위스 아미 멀티 툴(Swiss Army Muiti-tool)'이라고도 써져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물건 안에는 칼 말고도 많은 도구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들끼리 서로 어색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후자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그럼 우리는 왜 이 물건을 맥가이버칼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 물건을 발명한 사람이 맥가이버이기 때문이다.
1951년 미네소타에서 태어난 맥가이버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발명가였다. 대학에서 공학과 재료 과학을 공부한 후, 그는 일상적인 문제에 대한 실용적인 해결책을 만들기 위한 평생 탐구에 착수했다. 어느 날 스위스 알프스에서 하이킹을 하던 중 맥가이버는 다양한 작업을 처리할 수 있는 다기능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위스 아미 나이프의 기존 디자인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사용자가 부품을 쉽게 교체할 수 있는 모듈식 디자인의 새로운 유형의 나이프를 고안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인기를 얻은 혁신적인 도구인 Victorinox Swiss Army Knife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라는 것은 사실 지어낸 얘기이고(이 글을 지어내기 위해 Chat GPT에게 '맥가이버라는 사람이 빅토리녹스의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발명한 한 단락 짜리 픽션을 쓰시오. 단,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포함할 것'이란 프롬프트를 주었다. 그러니까 위 글은 내가 아니라 Chat GPT의 것이다. 스위스 알프스에서 하이킹하다가 스위스 아미 나이프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발상이 마음에 든다) 1980~1990년대 초에 국내에서 방영된 외화 <맥가이버>의 주인공이 자주 사용하던 도구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맥가이버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시기는 캠핑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텐트를 설치하거나 해체할 때, 혹은 잡동사니 꾸러미를 풀 때 주로 식가위나 과도를 사용하였는데 아무래도 적절치 않았다. 그래서 맥가이버칼이 생각났던 것인데 이것만 있으면 왠지 나무를 깎아 불을 피울 수도 있을 것 같고 나뭇가지를 엮어 배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혹시 다른 용도가 있을까 싶어 지금 기사를 찾아보니 2021년 6월 호주의 60대 남성이 4m 악어에게 물렸을 때 맥가이버칼로 혈투를 벌여 살아남았다고 한다. 악어에 끌려갈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안 살 수 없겠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맥가이버칼을 사용할 때의 효능감은 그리 높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어렸을 때 기념품으로 받은 맥가이버칼은 안으로 접혀있는 도구들을 꺼내기도 쉽지 않았고 그 도구들을 다 꺼낸다 해도 정작 쓸만한 것은 몇 개 없었다. 그 볼륨감 때문에 바지 주머니가 불룩해지는 것도 거추장스러웠다.
그럼에도 최근 이 도구를 사야겠다는 욕구(손에 꼭 쥐고 싶은 욕구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가 더욱 강해졌는데 그건 본격적으로 '다다다'를 그리고 글을 쓰고 블렌더를 공부하면서인 듯하다. 내 손에서 이뤄지는 결과물이 온라인 공간에만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없이 공허하다. 여기에 더해 AI의 빠른 발전으로 인한 물리적 세계와 디지털 세계의 역전 현상을 개인적으로 실감하고 있다. 팬데믹 전까지 두 세계가 병존했다면(사실 이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디지털 세계가 물리적 세계를 앞서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이러한 변화와 무관한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은 물리적 세계에서 디지털 세계로 무게중심을 옮겨가고 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세계를 '주류 세계'로 만드는 일에 다들 알게 모르게 동참하고 있는 실정이다.
맥가이버칼을 손에 꼭 쥐고 싶은 건, 물리적 세계와 연결된 무언가를 간직하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몸으로 체감해야 하는 것들이 이 세계에 더 남아있음을 일부러 확인해야 한다는 균형감각이 발동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건 작은 칼로 힘들게 나무를 깎아 불을 피우고 배를 만드는 일, 어쩌면 모험을 하고 악어를 만나고 작은 칼을 휘두르는 일이니까. AI가 할 수 없는 일은 아무래도 이런 일이 아닐까.
그. 래. 서. '다다다'로 수입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맥가이버칼을 사기로 했다.
읽고 있는 것 : 선물(루이스 하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