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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Jun 04. 2024

AI가 할 수 없는 일

2023. 3. 31. 금.


약 3년 전부터 사고 싶지만 아직 사지 않은 물건이 하나 있다. 

바로 맥가이버칼인데, 틈틈이 인터넷쇼핑몰이나 유튜브를 보며 혹시 세상에서 사라지진 않았나 안부를 확인하고 있다. 내가 사기 전에 사라지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인데, 한편으로는 이 유서 깊은 물건이 사라진다면 그건 정말 큰일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흔히 우리가 맥가이버칼이라고 불리는 이 물건의 공식 명칭은 '스위스 아미 나이프(Swiss Army Knife)'인 듯하다(단언하지 못하는 건 이 물건의 제조사인 빅토리녹스의 홈페이지에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로 되어 있지만 다른 사이트에서는 '스위스 아미 멀티 툴(Swiss Army Muiti-tool)'이라고도 써져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물건 안에는 칼 말고도 많은 도구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들끼리 서로 어색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후자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그럼 우리는 왜 이 물건을 맥가이버칼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 물건을 발명한 사람이 맥가이버이기 때문이다. 


맥가이버도 이제는 이렇게 할아버지가 되지 않았을까.


1951년 미네소타에서 태어난 맥가이버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발명가였다. 대학에서 공학과 재료 과학을 공부한 후, 그는 일상적인 문제에 대한 실용적인 해결책을 만들기 위한 평생 탐구에 착수했다. 어느 날 스위스 알프스에서 하이킹을 하던 중 맥가이버는 다양한 작업을 처리할 수 있는 다기능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위스 아미 나이프의 기존 디자인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사용자가 부품을 쉽게 교체할 수 있는 모듈식 디자인의 새로운 유형의 나이프를 고안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인기를 얻은 혁신적인 도구인 Victorinox Swiss Army Knife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라는 것은 사실 지어낸 얘기이고(이 글을 지어내기 위해 Chat GPT에게 '맥가이버라는 사람이 빅토리녹스의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발명한 한 단락 짜리 픽션을 쓰시오. 단,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포함할 것'이란  프롬프트를 주었다. 그러니까 위 글은 내가 아니라 Chat GPT의 것이다. 스위스 알프스에서 하이킹하다가 스위스 아미 나이프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발상이 마음에 든다) 1980~1990년대 초에 국내에서 방영된 외화 <맥가이버>의 주인공이 자주 사용하던 도구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맥가이버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시기는 캠핑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텐트를 설치하거나 해체할 때, 혹은 잡동사니 꾸러미를 풀 때 주로 식가위나 과도를 사용하였는데 아무래도 적절치 않았다. 그래서 맥가이버칼이 생각났던 것인데 이것만 있으면 왠지 나무를 깎아 불을 피울 수도 있을 것 같고 나뭇가지를 엮어 배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혹시 다른 용도가 있을까 싶어 지금 기사를 찾아보니 2021년 6월 호주의 60대 남성이 4m 악어에게 물렸을 때 맥가이버칼로 혈투를 벌여 살아남았다고 한다. 악어에 끌려갈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안 살 수 없겠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맥가이버칼을 사용할 때의 효능감은 그리 높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어렸을 때 기념품으로 받은 맥가이버칼은 안으로 접혀있는 도구들을 꺼내기도 쉽지 않았고 그 도구들을 다 꺼낸다 해도 정작 쓸만한 것은 몇 개 없었다. 그 볼륨감 때문에 바지 주머니가 불룩해지는 것도 거추장스러웠다. 


그럼에도 최근 이 도구를 사야겠다는 욕구(손에 꼭 쥐고 싶은 욕구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가 더욱 강해졌는데 그건 본격적으로 '다다다'를 그리고 글을 쓰고 블렌더를 공부하면서인 듯하다. 내 손에서 이뤄지는 결과물이 온라인 공간에만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없이 공허하다. 여기에 더해 AI의 빠른 발전으로 인한 물리적 세계와 디지털 세계의 역전 현상을 개인적으로 실감하고 있다. 팬데믹 전까지 두 세계가 병존했다면(사실 이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디지털 세계가 물리적 세계를 앞서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이러한 변화와 무관한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은 물리적 세계에서 디지털 세계로 무게중심을 옮겨가고 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세계를 '주류 세계'로 만드는 일에 다들 알게 모르게 동참하고 있는 실정이다. 


맥가이버칼을 손에 꼭 쥐고 싶은 건, 물리적 세계와 연결된 무언가를 간직하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몸으로 체감해야 하는 것들이 이 세계에 더 남아있음을 일부러 확인해야 한다는 균형감각이 발동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건 작은 칼로 힘들게 나무를 깎아 불을 피우고 배를 만드는 일, 어쩌면 모험을 하고 악어를 만나고 작은 칼을 휘두르는 일이니까. AI가 할 수 없는 일은 아무래도 이런 일이 아닐까.

그. 래. 서. '다다다'로 수입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맥가이버칼을 사기로 했다.


              읽고 있는 것 : 선물(루이스 하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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