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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Jun 04. 2024

당신은 어떻게 나를 만났나요?

2023.5.15.


  '다다다'를 작업하다 보니까 '프리퀄'이라는 개념이 새롭다. 영화 등에서 많이 사용하는 이 용어는 오리지널 작품의 시간상 앞선 이야기를 담은 번외 편, 속편 등을 말한다. <대부2> <신비한 동물사전> <배트맨 비긴즈> <스타워즈 1, 2, 3>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산행>의 프리퀄 애니메이션 <서울역>도 있다. 프리퀄이 제작되려면 무엇보다 오리지널 작품의 흥행과 매력이 담보 돼야 한다. 관심 없는 사람의 소싯적 이야기까지 듣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 

  사람들이 프리퀄에 관심을 갖는 것은 영화 작품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단절성이 일시적이나마 희미해지며 연속성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품 속 세계가 정말 존재하는 세계라고 (아닌 줄 알면서도) 믿게 만드는 효과가 프리퀄에는 있다. 속편도 이런 성격을 갖고 있긴 하지만 프리퀄은 오리지널 작품에 개연성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그 효과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무언가의 '내가 알기 전'을 보는 것, 혹은 상상하는 것은 기분이 묘해지는 일이다. 가령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여있는 스테들러 지우개는 몇 년 전 내가 발견하기 전까지 교보문고 광화문점 핫트랙스 매장 미술용품 코너에 진열되어 있었을 것이며 그전에는 (MADE IN  GERMANY라고 지우개 껍데기에 적혀있는 것으로 봐서) 독일 어딘가의 스테들러 필기구 공장에서 누군가의 손과 기계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며 또 그전에는 플라스틱 원료로서 여기저기 이런저런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들에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만나 지금은 내 책상 위에서 내가 어서 연필로 무언가를 잘못 쓰길 기다리고 있다(미안하게도 나는 글을 쓸 때 볼펜 혹은 노트북을 사용하며 그림 연습을 할 때도 거의 지우지 않는다). 내가 이 물건을 지우개로서 만나기까지 지우개에게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나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내가 이 지우개를 만남으로써 지우개가 비로소 지우개로서의 쓸모를 가졌다는 것과 나도 무언가를 지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역시 명확한 사실이다. 만나는 순간 아주 조금이지만 기존과 다른 세계를 서로에게 펼쳐놓았다. 나와 이 지우개는 이만큼 가깝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 중 서로의 세계에 영향을 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오랜 시간 알고 지냈어도 서로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잠시 스쳐가기만 했는데도 되돌릴 수 없는 큰 변화를 몰고 온 사람들도 있다. 그것이 좋은 변화이든 나쁜 변화이든  난 그런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이 사람... 뭐였을까?'. 

내 삶에 이런 영향을 끼치게 된 그들의 '거대한 이유' 같은 것이 늘 궁금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그 사람에 대한 애정(혹은 애증)과 관심이 시작되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러고 보면 프리퀄은 독자가 보고자 하는 욕구보다 창작자가 공급하고자 하는 욕망이 더 센 콘텐츠가 아닐까. 궁금증을 못 이겨 내 이야기 속 인물들의 전사(前史)를 만드는 일.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픽션의 공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시간을 되돌려 내 인물들의 '거대한 이유'를 만들려는 욕구는 창작자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마 많은 작품의 등장인물들에게는 작가가 발표하지 않은 그들의 전사가 어느 수첩, 어느 머릿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에피소드가 140회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다다다' 속 캐릭터들에게는 어떤 전사가 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작가가 이렇게 말하면 너무 늦은 것 아니냐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솔직한 심정이다. 아직도 나는 내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을 매일 조금씩 더 키워나가고 있는 중이다. 애정의 결과로 요즘은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을지 틈틈이 들여다보고 있다. 나를 만나기 전, 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 조금씩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굴려보고 있는 중이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만났는지 보다 당신이 어떻게 나를 만났는지를 더 궁금하게 만드는 이상한 힘에 대해 생각하며.


            보고 있는 책 :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줄리언 반스), 선물(루이스 하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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