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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oniist Jul 09. 2021

공책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

공책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

2021. 6. 16.

하늘 정말 아름다웠다


한가한 낮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기회가 있으면 문구점에 들어가보려고 한다. 딱히 살 것이 없어도 일단 들어가보면 분명 나는 설레고 말것이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문구점이나 서점 특유의 냄새를 맡으면 마치 마음 속에 나비가 100마리 정도 날아다니는 것처럼 마구 설렌다(방금 깨달았는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심각한 중증인 듯 하다. 비슷한 효과를 주는 냄새로 양념갈비 굽는 냄새가 있긴 한데...그 결이 조금 다르다). 

요즘 대형 서점이나 문구점은 자체적으로 향을 개발해서 매장 전체에 그 향이 은근히 퍼지게 하는데 물론 나쁘진 않지만 내 나비들을 날게 하진 않는다. 종이가 쌓여 있는 곳에서 발산하는 특유의 냄새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대는데 대형 서점들이 그것을 잃게 된 것 같아 못내 아쉽다. 

서점 냄새만큼 좋은 게 없는데.


어린 시절 나는 문구점 냄새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 곳에 있는 모든 것들을 좋아했다(다행히 우리 동네 문구점 '소라문방구'의 주인 아저씨는 꽤 친절한 편이셔서 나와 잘 놀아주셨기에 주인 아저씨까지도 좋아했다. 덕분에 나는 돈만 생기면 소라문방구로 달려가 나의 애정을 과시하곤 했었다). 


잘 찾아보면 아직도 문방구가 있다.


그 나이에는 모양자 아니 각도기 하나만 새로 사도 행복했었다. 그 기억이 남아서인 것 같다. 이렇게 커버렸음에도 문구점에만 들어서면 부끄러울만큼 설레는 건. 문구점에 있는 수많은 보물들 중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공책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될 때 문구점에서 새 공책을 사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의식이었다. 진열되어 있는 공책들의 깔끔한 일러스트를 보고 있으면 어서 저 표지에 내 이름 석자와 소속 단체명(그래봤자 초등학교지만)을 새겨 넣고 싶다는 욕망이 불끈불끈 솟아오르곤 했다. 

공책에 대한 애정이 특히 심해진 것은 초등학교 3학년이 시작될 때였는데 1~2학년에는 저학년용 공책을, 3학년부터는 고학년용 노트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고학년용 노트가 주는 만족감은 단지 내지의 성숙함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정말 공책이 아니라 노트의 세계가 펼쳐졌다고 할까. 표지의 일러스트가 저학년용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가 기억하는 내 첫 3학년 공책의 표지는 연필로 그린 커다란 야구글러브 이미지였는데 어딘지 모를 한쪽 귀퉁이에 찰리 브라운이 그려져 있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걸 보면 그때 그 표지를 꽤나 시간을 들여 찬찬히 살펴보았나보다. ‘드디어 공책을 졸업하고 노트를 손에 쥐게 되었군’하고 말이다. 


그 외에도 표지에 스마일로고를 입체적으로 그려 팝아트 느낌을 낸 공책도 기억에 남는다. 매끈매끈한 재질의 표지였는데 시리즈로 있어서 전부 구입했던 것 같다(그때는 과목이 많다는 게 좋기도 했다. 그때 뿐이지만). 역시 그 표지도 참 오래오래 봤었다. 생각해보면 공책 뿐만아니라 모든 일러스트를 좋아했다. 크리스마스 카드, 새해엽서, 우표, 지우개(선생님 지우개 시리즈 정말 좋아했다)에 그려져 있는 일러스트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이걸 좋아하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삶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라는 걸 이제는 잘 알고 있다. 


'다다다'를 그리다보니 나는 왜 그림을 그리고 싶어할까라는 조금 본질적이고 본격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전공도 직업도 전혀 관계 없는 일을 하면서 아직까지도 그림을 잘 그리고 싶고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다. 사실 그것 때문에 내 삶이 좀 더 비효율적이게 된 적도 있다. 깔끔하게 접고 그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곳에 쏟았더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여전한 수준의 그림력(꾸준히 밀어본다)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림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기에 이런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야구장에서 야구공을 바라보다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매우 하루키적인 구실 하나가 나에게도 있으면 참 좋겠다는 마음을 품으며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는데 그 끝에는 야구공이 아니라 초등학생 때 내가 마주했던 그 공책들이 있었다. 사실 나는 그 공책을 사기보다는 그 표지의 일러스트를 산 것이 아닐까. 나를 매우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 내 마음을 힘껏흔들 수 있는 것. 나에게 큰 감동을 주는 것. 그것을 샀다(다행히 그 정도의 구매력은 있는 어린이였다). 어린 내가 커서도 그 감각을 잊지 않도록 마음 한 쪽에 아주 깊게 새겨 놓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나 이런거 좋아해. 잊지마’. 

당연한 수순으로 좋아하면 직접 만들고 싶다. 



공책 표지 같나요.

이번에 캐릭터별 이미지 컷을 그릴 때 그 공책 표지들을 많이 떠올렸었다. 커다랗게 자리 잡은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표현하는 한 마디의 대사. 그런 걸 그려보고 싶었다. 이런 표지가 있는 공책을 본다면 어린 시절의 나는 갖고 싶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고(대사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 같긴 하다). 그리는 내내 즐거웠다. 시간이 있다면 또 해보고 싶다. 내 그림이 누군가의 마음을 살짝 들었다 놓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마시고 있는 것 : 카페 리브레 카페라떼

- 듣고 있는 것 : 더 발룬티어스

- 읽고 있는 것 : 나는 오늘도 콘텐츠를 팝니다(이필성), 시드니(무라카미 하루키), 커피를 좋아하면 생기는 일(서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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