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낱말들의 바탕치기
4-7. 낱말들의 바탕치기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이었어요. 선생님께서는 칠판에 ‘낱말들의 바탕치기’라고 썼어요.
“바탕치기가 뭘까요?”
“팽이치기같은 놀이인가요?”
장난기가 담긴 목소리로 누군가 물었어요. 선생님은 웃었어요. 그것은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치다’라는 말은 뭐뭐라고 여긴다는 거예요. 이를 테면, 이것을 연필이라고 말하잖아요. 한국 사람은 이것을 연필이라고 치는 거지요. 연필이라고 여기는 것이고요. 영국 사람은 펜슬이라고 치고 여기는 거지요. 또 연필을 100원이라고 치는 거지요. 그래서 이 연필은 100원이라고 여기는 거지요. 우리가 말하는 것들은 어떤 것을 그 말소리로 내고 그렇다고 치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낱말들의 바탕치기’란.”
“아, 알 것 같아요. 어떤 낱말의 바탕이 되는 것을 친다는 말이에요.”
“추리를 잘 했네요. 누가 조금만 더 보태볼래요? 지난 시간에 했던 잠자리, 나비를 떠올려 보세요.”
우리는 이리저리 이어보려고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자리 잡고 잠잠하게 있는 것을 잠자리라고 치는 거지요. 그런 것을 잠자리라고 여기고 친 셈이지요.”
우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다, 치다라는 말의 뜻을 대충 알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어떤 낱말의 바탕이라고 여기고 친 것이라는 거예요. 오늘도 지난 시간에 한 것처럼 물, 샘물, 불의 바탕치기를 알아볼 거예요. 물은 왜 물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요?”
“물렁물렁해서요.”
“그럴 수도 있네요. 좋은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우리들은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물은 ‘물다’라는 말에서 온 것이에요. 물은 무는 것이에요. 물속에 손을 넣어보세요. 그러면 손을 감싸고 물이 물어요. 아기들이 자신의 주먹을 입으로 물듯이 말예요.”
짝이 제 주먹을 입속에 가져가는 것을 보았어요.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선생님이 뭔가를 꺼내놓는 것에 눈길이 갔어요.
"자, 여기를 보세요. 물이 담긴 수조가 있어요. 여러분이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 비닐도 준비했지요. 누가 나와 볼래요?"
나는 내가 나가고 싶었지만 언제나 행동이 재빠른, 별명이 번개인 친구가 손을 들었어요.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번개를 앞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선생님은 번개의 손에 비닐을 씌웠어요. 선생님이 "시작."이라고 하면 눈을 감고 물에 천천히 담가볼 텐데, 손을 천천히 담그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도 살피라고 단단히 일렀어요. 아이들은 잘 보려고 교탁 둘레로 나갔아요. 그러자 선생님은 앞으로 나간 아이들에게 앉으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내 자리에서도 수조가 잘 보였어요. 번개는 선생님 말씀처럼 천천히 손을 넣었어요. 아이들은 숨죽이고 찬찬히 살폈어요.
우리는 또렷이 보았어요. 비닐이 쪼그라들었어요.
번개는 "손에 뭔가 쪼이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무튼 어떤 힘이 느껴졌어요."라고 말했어요. 선생님은 이게 바로 물이 손바닥을 고루게 물어준 것이라고 말했어요. 이빨로 물면 이빨이 닿는 부분만 무는 것인데 물에 넣으면 온 사방으로 물이 무는 거예요. 물이 물다라는 말과 뿌리가 같다는 것을 눈으로 또렷하게 보았어요. 선생님은 말씀을 이어나갔어요.
“물에 어떤 것을 올려놓으면 뜨거나 가라앉아요. 가벼운 것은 뜨고 무거운 것은 가라앉아요. 그러니까 ‘무게, 무겁다’와 같은 말도 물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물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을까요?”
친구들은 신이 나서 말했어요.
“물은 흘러요. 강물도 시냇물도 도랑물도 흘러요.”
“폭포처럼 떨어져요.”
“호수나 연못이나 저수지처럼 고여요.”
“지하수처럼 스며들어요.”
“얼어요.”
그러자 똑똑한 하빈이가 말했어요.
“그건 얼음이지 물이 아니에요.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얼음을 물이라고 하지는 않아요.”
똑똑이의 그 한마디에 모두들 얼음이 될 뻔했지요. 선생님께서 말을 이으셨어요.
“흐르는 물, 떨어지는 물, 고인 물, 스며든 물 모두 어떤 점에서 같을까요?”
“물요.”
여럿이 이렇게 말하자 선생님께서는 맞다고 하셨어요.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갖가지 물에서 볼 수 있는 으뜸의 성질은 바로 무는 것이에요.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일 때는 아무렇게나 붙이는 것이 아니겠지요. 모두가 고루 두루 쓸 수 있어야 하니까 대표적인 성질이 드러나도록 이름을 지어요. 물 수(水)는 중국 사람이 흐르는 물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해요. 물을 흐르는 것으로 나타낸 글자를 보면 물을 ‘흐르다’라고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더 으뜸이 되는 무는 성질을 보지 못하게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한자를 배우더라도 우리말의 밑뜻을 또렷하게 알고 쓰면 좋겠어요.”
선생님은 우리를 잠시 둘러보시더니 다시 말을 이었어요.
"물은 무르다라는 말과 뿌리가 같아요. 무르다에서 물렁물렁하다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겠지요."
선생님은 우리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보듯이 천천히 말을 했어요.
"옛날 사람들은 불과 물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무서웠을까요?"
"불이 더 무서웠을 것 같아요. 바로 뜨겁잖아요."
"물이 더 무서웠을 것 같아요. 물은 서서히 잠기지만 피해가 더 컸을 것 같아요."
"여러분이 말한 이유가 그럴듯 해요. 큰 불이 나면 도망가면 되지요. 비가 오면 골짜기로 물이 몰려들어 갑자기 불어나요. 강가에 살던 사람들은 갑자기 불어난 물로 큰 난리를 겪었어요. 그래서 물이 더 무서웠어요. 물에서 무섭다라는 말이 뻗어나왔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요즘이라면 일기 예보가 있으니까 미리 피하면 되지만 옛날 사람들은 불보다 물을 피하기 어려웠으니 더 무섭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에서 무섭다라는 말이 나오다니 놀랐어요.
“샘물은 왜 샘물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요?”
“새어나오는 물?” 또 하빈이가 불쑥 대답을 하였어요. 선생님께서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씀 하셨어요.
“그래요. ‘새다- 샘’. ‘새는 물’이 샘물이에요. 바위틈으로 졸졸 새어나오는 물을 샘물이라고 하잖아요.”
“어? 샘물은 파는 것인데….” 라고 짓궂은 상현이가 말하자, 모두 웃었어요. 선생님은 이어서 말씀하셨어요.
"우물은 뭘까요?"
우리는 갑자기 얼음이 되었어요.
"우물은 둥글게 울타리가 쳐 있지요. 울타리친 물이 우물이예요."
나는 말이 만들어지는 것이 상상이 아니라 어떤 모습이 그려지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에 놀랐어요.
선생님이 우리에게 다시 물어봤어요.
“불은 왜 불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요?”
“불이 나면 ‘불이야!’라고 해서요.”
“그러니까 왜 불을 불이라고 했을까요?”
“바람이 불면 불이 더 번지니까요.”
“비슷하네요. ‘불 - 불다’. 불은 ‘불다’에서 온 말이에요. 불이 붙으면 점점 불어나잖아요. ‘불이야!’ 라는 말은 ‘불어나고 있어. 어서 피해!’ 라는 말일 거예요. 풍선에 바람을 불면 풍선이 점점 불어나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아, 또 있어요. 산에 비가 오면 계곡물이 삽시간에 불어나요. ‘불다’는 말은 점점 덩치가 커지는 것이에요. 불 화(火)는 중국 사람이 불꽃의 모양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해요. 불을 활활 타오르는 것으로 나타낸 글자를 보면 불꽃이 이글거리는 생각에 사로 잡혀 으뜸이 되는 불어나는 성질을 보지 못하게 될 수 있어요. 물과 마찬가지로 불도 水나 火라는 한자말에 갇히지 않도록 우리말의 밑뜻을 똑똑하게 알고 써야겠어요.”
참 놀랍지 않나요. 우리말은 이렇게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여태까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참 고마웠어요. 세종대왕님께서 중국말이 우리말과 달라서 새로 글자를 만든다고 하셨다지요. 정말로 우리말과 중국말은 다른 것 같아요. 우리는 우리의 바탕말이 지니고 있는 밑뜻을 또렷하게 알고 중국말을 비교하면 더욱 깊고 넓게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깊이 새겼어요. 늘 남의 것이 좋은 것인 줄 알고 아무 생각 없이 따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깨달았어요.
말이 가진 밑뜻을 알고부터는 나는 나비를 볼 때 납작한지 꼭 확인해요. 나는 벌을 보면 도망가지 않고 벌벌거리는 것을 보려고 가만히 있어요. 벌은 가만히 있으면 내가 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요. 그런데 허우적거리면 벌이 놀라서 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도 벌도 다 다쳐요. 벌은 침이 빠지면서 죽어버린대요.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은 벌을 위해서예요.
나는 잠자리를 볼 때마다 잠을 자듯 잠잠히 있는 잠자리를 잡으려고 손가락을 빙빙 돌려보지만, 한 번도 잡지 못했어요. 나는 파리를 보면 정말 팔팔한지 보려고 쫓아요. 파리는 내가 쫓기도 전에 팔팔하게 날아가 버려요. 파리도 한 번도 잡지 못했어요. 하지만 파리는 지저분한 곳에 앉았다가 우리가 먹는 음식에 앉아서 병균을 옮기니까 쫓든지 잡든지 해야 해요.
나비는 그냥 나비가 아니에요. 벌은 그냥 벌이 아니에요. 잠자리는 그냥 잠자리가 아니에요. 파리는 그냥 파리가 아니에요. 매미는 그냥 매미가 아니에요. 나에게 아주 많은 생각을 차리게 해 주어요. 선생님 덕분에 늘 쓰는 말의 밑뜻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버릇이 생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