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시대의 카피라이터

뇌가 스트레칭하는 마음으로

by 일조

카피를 쓸 때의 내 마음은 이렇다. 과거 시험을 본다고 생각한다. 클라이언트의 요구 사항이 품격이라면, 나온 시제가 <품격>이라고 생각하고 답안을 쓰듯 써 보는 것이다. 과거 시험을 볼 때 시제로 나온 단어를 그대로 쓰는 것은 바보짓이다. 품격을 쓰지 않으면서 품격이 느껴지게 쓸 수 있는가를 보는 시험이기 때문이다. 클라이언트 요구 사항이 단어일 때는 그나마 쉽다. 문장으로 제시받을 때는 많이 어렵다. 예를 들어 "일잘러들의 필수앱"이라는 문장이 주어지면 '일잘러' 라는 단어를 카피에 쓰지 않기란 쉽지 않다. 너무나도 유혹적이기도 하다. 그래도 애써 안 써 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나중에 타협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발상의 틀을 깨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크리에이티브 브리프에서 제시받은 단어와 문장은 가이드 역할에만 충실해야 한다. 그것을 모범 답안으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조금씩 변형을 주려고 하는 것은 성장에 별 도움이 안 된다. 몇 년 동안 그런 시도를 해 보았고 결과를 겪어 봤기 때문에 안다. 그렇게 할 경우 단어와 문장이 창살과 문지기가 되어 내 생각을 가둬 버렸다. 나름 열심히 시간을 쓰고 애를 써서 카피를 써도 다 그 밥에 그 나물 같은 카피만 나왔다. 내 사고가 틀에 갇혀 버렸기 때문이다.


갇히지 않으면서 사고의 확장을 하기 위해 내가 터득한 방법은 이렇다. 카피 쓸 시간이 부족한 경우 유의어 사전을 활용한다. 제시받은 단어와 의미적으로 친척인 단어들을 찾아보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주제와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단어장이 생긴다. 평소에 하는 훈련은 이렇다. 어떤 단어를 놓고 그 단어와 연상되는 생각을 낙서하듯 끄적여 보는 것이다. 일탈이라는 단어 밑에 벗어남, 관심법, 잘못 그린 지도, 욕망 더하기 용기, 일하다 탈 남, 이탈 전에 하는 행동, 뛰쳐나가 봄, 일하기 전에 쓰는 탈 등의 생각을 자유롭게 써 보는 것이다. 무척 재미있기도 하고 하다 보면 생각의 근육이 늘어난다. 마치 뇌가 쭉쭉 늘어나는 기분이랄까.


지금 시대는 유연성이 능력이다. 경계를 넘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생산성이라는 명목으로, 빨리 써내야 한다는 이유로, 정해진 틀 안에서 반복 수행만 한다면? 내가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무대에서 내려가야 할 날이 빨리 올 것이다. 나는 한글을 잊어먹기 전까지 카피를 쓰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틀 밖으로 생각을 늘려 보는 놀이를 즐긴다.

작가의 이전글부의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