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rd & Diz.

재즈 대통령을 꿈꾸었던 비밥의 영웅 Diz!

by XandO

Bloomdido - Bird & Diz


1955년 3월 12일, 찰리 파커(Charlie Parker, “Bird”)는
34세의 어처구니없이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장소는 뉴욕 스탠호프 호텔의 한 스위트룸으로,
그곳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니카 드 코닉스워터 남작부인(Nica de Koenigswarter) 소유의 거처였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렴과 위궤양으로 인한 합병증이었으나,
실질적인 원인은 오랜 약물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극심한 정신적 피로와 불안이었다.

검시관은 그의 시신을 보고 나이를 50~60세로 잘못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몸은 이미 혹독한 삶의 무게에 의해

극도로 피폐해져 있는 상태였다.

사망 직전, 파커는 남작부인의 아파트에서
TV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며 웃다가 갑자기 쓰러졌고,
곧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찰리 파커는 죽기 전,

오랜 친구이자 음악적 동지였던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를 찾아 가 이야기하는 장면이

영화 < Bird >에서도 나온다.
그의 말은 두서없고 많이 불안정했으며,

그 안에는 고통과 불안,

그리고 마지막 위안을 향한 갈망이 묻어 있었다.

디지는 파커를 진정시키려 애썼으나,

그 대화는 결국 그 둘이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된다.
훗날 디지는 그날의 대화를

“버드는 아마 위안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라도 회고했다.
비밥의 두 창시자가 마지막으로 나눈 그 짧은 순간의 대화는,

천재의 고독과 인간적인 유대가 교차한

안타까운 회상으로 남았다.


비밥의 역사를 개척해 낸 두 사람은

재즈의 혁신자라는 측면에서는 동등했지만

세상은 그들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억한다.

찰리 파커는 요절한 천재,

불안과 중독 속에서 타올랐던 비극적인 신화의 상징이며
그의 삶은 재즈역사 속에서

‘불꽃처럼 사라진 예술가’의 전형으로 기억되는 반면,

디지 길레스피는 이성적 개혁가였다.
디지는 비밥을 체계화하고 후배를 양성하며,

재즈를 하나의 논리적인 언어로 정립하려 시도했다.
파커가 영혼의 세계를 연주했다면,

디지는 그 영혼을 세상에 설명할 수 있는 논리로 구조화했다.

찰리 파커가 신격화된 재즈의 신화로 남았다면,

디지 길레스피는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재즈의 위인으로 남았다.


Manteca - Dizzy Gillespie


디지 길레스피는 비밥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후배 연주자들에게 교육했고,

비밥을 하나의 체계적인 어법을 가진 예술의 하나로 구조화하였다..

또한 쿠바 출신의 타악기 연주자였던 챠노 포조(Chano Pozo)와의 협업을 통해

[ Manteca ]를 발표하며 재즈에 아프리카, 라틴 리듬을 융합했다.
이것은 훗날 라틴 재즈 유행의 출발점이 되었고,

재즈가 글로벌화된 음악으로 확장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1950년대에는 미 국무부의 문화사절로 전 세계를 순회하며 재즈를 알렸으며,
그의 유쾌함과 교양은 재즈를 미국의 문화적 언어로 자리 잡게 한 원동력이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중에

디지에 관한 재미있는 사건이 하나 있다.

1964년,

트럼펫을 불던 이 남자가 뜻밖의 선언을 한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백악관은 Blues House로 바꿀 거야.”


처음엔 단순한 농담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공연 예약 에이전시가 장난 삼아 “Dizzy for President”라고 적힌 버튼을 찍어냈고,
그걸 본 팬들이 “정말 나와도 괜찮겠다”며 열광했다.
디지 길레스피는
“왜 출마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짧게 답했다.

“Because we need one.”
(우리에겐 진짜 대통령이 필요하니까.)

툭하고 내뱉은 재즈식 정치 풍자였다.
말은 웃기지만, 웃음 뒤엔 뼈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짜낸 재즈 공화국의 정부내각 구성은 더 기가 막혔다.

국무장관에 듀크 엘링턴

국방장관에 맥스 로치

CIA 국장에 마일스 데이비스

평화장관에 찰스 밍거스

농무장관에 루이 암스트롱을 지명한다.

그리고 그의 실제 공약들도 엉뚱했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전쟁 대신 Jam, 냉전 대신 Blues를!

앨라배마의 인종차별주의자 조지 월리스를 베트남으로 추방하겠다!

모두에게 주택과 병원을, 그리고 더 많은 음악을!

베트남전 반대, 인권 존중, 평등 사회!


그의 메시지는 유머의 포장지에 싸인 이상적인 정치적 메시지였다.

디지 길레스피는 선거자금을 모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버튼과 티셔츠 판매로 모은 돈은 전부
CORE와 SCLC, 즉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끌던 민권운동 단체에 전액 기부되었다.

그는 결국 막대한 자금력 조달과 전국적인 조직력을 갖추는 것에 있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공식 후보로 등록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유쾌한 재즈 공화국을 위한 캠페인은 그 자체로

재즈와 재즈팬들을 향한 위대한 선언으로 남았다.


Salt Peanuts. - Dizzy Gillespie


그의 상징이 된 부풀어 오른 양볼과

위로 치켜든 트럼펫 벨은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연주 도중 트럼펫의 벨이 위로 휘어졌는데,

뜻밖에도 그 음색이 더 풍부하고 따뜻하게 들린 것이다.
그는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했고,
이후 그 독특한 실루엣은 디지 길레스피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디지 길레스피는 후배들에게 복잡한 이론을 가르칠 때도

언제나 유머와 비유를 사용했다.
그의 수업은 웃음 속에서 진행되었고,
마일스 데이비스를 비롯한 많은 젊은 음악가들이

그의 방식으로 비밥의 언어를 익혔다.

무대 위에서 그는 늘 농담을 던졌지만,
그 그의 연주는 “재즈의 자유는 질서에서 비롯된다”는

진지한 신념을 늘 강조했다.


찰리 파커의 천재성과 드라마틱한 짧은 생애로 더욱 신격화되어 과장된 삶에 비해

어쩌면 디지 길래스피의 명성과 입지는 턱없이 저평가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파커가 내면의 불안과 중독 속에서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짧은 생을 마쳤다면,

디지는 절제와 유머, 그리고 학구적 태도로 자신의 음악과 삶을 다스렸다.

그는 연주자이면서 동시에 교육자였고,

누구보다 강한 조직력을 지닌 밴드 리더였다.


파커가 재즈를 ‘내면의 자유’로 끌고 갔다면,

디지는 그것을 ‘세계의 언어’로 확장했다.

그는 70대에도 UN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각국의 음악가들과 무대를 나누었고,

아프로-쿠반 리듬을 재즈 안으로 끌어들여 문화적 경계를 허물었다.


그의 아내 로레인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디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이 남긴 음악을 들으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1993년 1월 6일,

뉴저지 엥글우드 병원. 향년 75세의 비밥의 영웅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파커가 재즈의 정신을 ‘해방’으로 보여주었다면,

디지는 그 해방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한 재즈의 위대한 영웅이다.


Groovin' High - Bird & D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