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성향의 사람들을 위한 캐럴.
한때 온 세상을 휩쓸었던 MBTI 열풍은 이제는 조금 잦아든 분위기다.
혈액형으로 사람의 성격을 네 가지 틀에 가두던 시절에 비하면,
16가지의 세분화된 접근법은 사람들에게 묘한 신뢰와 호기심을 안겨주었다.
물론 심리학을 전공한 이들은 이것 역시 혈액형별 성격설과 큰 차이 없는
근거 없는 논리라고 지적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타인을 이해하고 나를 설명할 단서를
그 알파벳 네 글자가 주는 재미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나는 'INTP'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가끔 놀림의 대상이 되는 그 유형.
재미있는 점은 'I(내향형)' 성향만큼은
100%라는 확고한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반면 나머지 N, T, P 수치는 55%에서 60%를 오가는 경계선에 걸쳐 있다.
사실 사람의 성향을 어찌 칼로 자르듯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겠는가.
그날의 기분과 날씨, 처한 상황이나
마주하는 상대에 따라 가치판단의 기준은 수시로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I'라는 내향적인 성향 하나만큼은 MBTI 분석을 떠나
나의 성향임이 분명하다.
흥미로운 변화는 나이가 들고 사회화가 진행되면서 시작되었다.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 특히 나를 오래 보지 않은 이들에게
나는 '극 E(외향형)'로도 비친다.
내향적인 성향이 사회생활에서 그리 유리하지 않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으며,
나는 어느덧 나를 속이는 법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타인과 활발히 소통하고 에너지를 발산하는 모습은
일종의 사회적 생존 전략이자 잘 길들여진 가면이다.
그래서일까.
타인과 에너지를 나누지 않아도 되는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싶어진다.
취향 역시 자연스럽게 그 결을 따라간다.
여럿이 어울려야 하는 일보다는
혼자서 완결 지을 수 있는 일들에 끌린다.
혼자만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는 독서,
정성껏 내린 커피 한 잔,
나만의 공간을 가득 채워주는 음악.
가벼운 근력 운동이나 실내 사이클,
혹은 정처 없이 혼자 걷는 것을 선호한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그 순간이야말로
내가 가장 나다워지는 시간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캐럴이다.
노르웨이 재즈 보컬리스트 솔베이 슬레타옐(Solveig Slettahjell)의 앨범 < Natt i Betlehem >(2008)은
북유럽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 가운데서도 제작 방식과 장소 면에서
다른 상업적 크리스마스 캐럴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작품이다.
이 앨범은 파티나 축제용 캐럴 음반과는 다르다.
상업적 캐롤들의 빠르고 흥겨운 템포나 들뜬 분위기의 합창 편성이 아니다.
대부분의 곡은 느리고 차분하며, 연주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녹음은 팔레스타인 베들레헴의 [ 예수 탄생 교회 ]에서 진행됐다.
관광객이 없는 심야 시간대에
실제 공간이 가진 잔향과 교회의 자연 음향을 그대로 담았다.
후반 마스터링 작업에서도 인위적인 리버브를 더하지 않았다.
편성은 보컬, 피아노, 트럼펫으로 간결하다.
피아노는 베들레헴 음악원 소유의 1882년에 제작된 스테인웨이 그랜드 피아노의
빈티지하면서도 따뜻한 소리이다.
음색은 선명하지만 과도하게 밝지 않다.
트럼펫은 멜로디 중심 연주보다 보컬의 멜로디 사이의 여백을 채워간다.
앨범 수록곡 대부분은 노르웨이 전통 찬송가다.
그중 [ Å kunne jeg bare bli barn igjen ]은 이 앨범의 대표적인 곡이다.
제목의 뜻은 “아, 내가 다시 어린아이가 될 수만 있다면”이다.
1858년에 작사되고 그 다음해인 1859년에 곡이 완성되어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불려 온 노르웨이 성가이다.
가사는 시인 마리 벡셀센(Marie Wexelsen),
곡은 페데르 크누센(Peder Knudsen)의 작품이다.
벡셀센은 다수의 크리스마스 찬송가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도 노르웨이 교회와 가정에서 사용된다.
가사는 간결하다.
어린 시절의 상태를 회상한다.
불안과 걱정이 없던 순수한 시간.
그녀는 차분하고 사색적이다.
템포는 머무는 곳의 느린 숨결을 따른다.
그리고 멜로디 사이에 여분의 침묵을 둔다.
가사는 의미 전달보다는
이미지를 상상하케하는 향기에 가깝다.
앨범 < Natt I Betlehem >은 크리스마스를 장식는 음반은 아니다.
크리스마스의 시간을 이미지와 분위기로 담은 기록물이다.
심야의 교회 공간, 최소한의 연주, 절제된 감정.
시대적 유행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I 성향의 내향인들에게는 더없이 감사한 캐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