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e Jazz, Cecil Taylor. Pt 1

by XandO

재즈는 쉽지 않은 음악이다.

일상에서 편하게 접하기 쉽지 않다는 것은,

이 음악이 좀처럼 친숙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 낯섦은 종종 불편함으로 이어지고,

결국 난해하다는 인상으로 굳어진다.


게다가, 재즈는 혼란스럽다.
서로 전혀 닮지 않아 보이는 여러 스타일의 음악이

모두 ‘재즈’라는 이름 아래 묶여 있다.
하드밥과 쿨 재즈, 퓨전과 보사노바가 한 장르로 불리는 현실은

재즈 초심자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프리재즈는 그 혼란의 정점에 있다.
재즈의 혁신가로 불리는 마일스 데이비스조차

이 음악을 두고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시기가 있었다.
그만큼 기존의 재즈 문법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기존 재즈의 문법에서 도망치려고 발버둥 친 결과가 프리재즈였다고 말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프리재즈가 등장한 이후,

빌보드 앨범 차트 200위 안에 오른 프리재즈 음반은 단 한 장도 없다.
대중은 차치하고라도, 전문적인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이 음악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극단적인 즉흥성과 형식의 해체는 종종 ‘예술을 위한 예술’로 이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즈 애호가와 평론가, 재즈 역사 연구자들은
재즈의 역사와 혁신을 이야기할 때 프리재즈를 빼놓지 않는다.


짧은 시간, 소수의 연주자들이 만들어낸 음악임에도
이 스타일이 지닌 예술적 가치는 수없이 반복해서 논의되어 왔다.

왜일까.
왜 프리재즈는 대중성과 거리를 둔 채로도
재즈의 역사에서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을까.

이 글은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


프리재즈라는 장르의 명칭을 만든 오넷 콜먼은

기존 재즈의 규칙을 파괴했다.

1959년, 뉴욕 파이브 스팟 카페에서의 충격적인 데뷔와

앨범 < Free Jazz >를 통해 새로운 재즈의 탄생을 선언했고

왜 그가 '화성'과 '곡의 형식'을 버려야만 했는지를 소리로 증명한다.


그리고 비밥과 하드밥의 최고 정점에 올라있던 존 콜트레인이

앨범 < A Love Supreme >을 들고 나와 프리재즈의 문을 박차고 들어선다.

비밥의 최고 인기스타이자 재즈의 거장이었던 그가, 왜 극한의 프리 재즈로 나아가야 했는가?

앨범 < A Love Supreme >에 이은 앨범 < Ascension >을 중심으로,

프리 재즈가 단순한 소음이 아닌

종교적이고 영적인 체험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통해

"혼돈 속에서 찾은 영적인 신성함"을

또 다른 차원의 예술적 영감이 담긴 소리로 구현해 낸다.


그리고 프리재즈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또 다른 세상을 찾아 나선다.


Free Improvisation #3 - Cecil Taylor


세실 테일러(Cecil Taylor, 1929–2018)는

재즈의 기존 형식을 근본부터 재설계한 음악가이다.
그의 작업은 파괴라기보다 해체와 재구성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종종 ‘에너지의 건축가’로 불린다.

세실 테일러의 독특한 음악적 방향성은

클래식 교육과 아프로-아메리칸 리듬 전통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두 세계는 충돌했고, 그로 인한 폭발은 그의 음악 전반을 규정했다.


그는 1929년 뉴욕 퀸즈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음악의 출발점은 어머니였다.
피아니스트이자 무용가였던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 피아노 공부를 시작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세실 테일러는 소리뿐 아니라 소리에 반응하는 몸의 움직임을 함께 익혔다.
이 경험은 훗날 피아노 연주에 전신을 사용하는 독특한 연주 방식으로 이어진다.

이후 그는 뉴욕 음악대학(New York College of Music)과

뉴잉글랜드 음악원(NEC)에서 작곡과 편곡을 전공했다.
학업 과정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벨라 버르토크를 비롯한

20세기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작곡 기법을 체계적으로 경험한다.
리듬의 분절, 불협화음, 구조적 긴장은 이 시기에 내면화된다.

하지만 그의 관심이 클래식에만 머문 적은 없다.
밤이 되면 그는 듀크 엘링턴과 델로니어스 몽크의 연주를 수없이 반복해 들었다.
유럽 음악의 구조적 엄격함과 재즈가 지닌 즉흥성은

이미 이 시점부터 함께 융화되기 시작한다.
이 두 요소의 자연스러운 융합이 이후 세실 테일러 음악의 기본 바탕으로 자리 잡는다.


You'd Be So Nice To Come Home To - Cecil Taylor


1950년대 중반,
세실 테일러는 뉴욕 재즈 씬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등장은 비밥 체계의 전통을 기반으로 한 변주가 아니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재즈의 질서 자체에 대한 폭탄 같은 문제 제기에 가까웠다.

데뷔 앨범 ⟨Jazz Advance⟩(1956)는 그 출발점이 된다.
리듬에는 여전히 스윙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피아노 터치는 이미 관습적인 코드 운용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화성은 고유의 기능을 거부했고,

피아노의 멜로디와 리듬은 오직 그 밀도와 압력으로만 유효했다.


1957년 뉴욕 ‘파이브 스폿(Five Spot)’에서의 공연은 그에게 대전환점이었다.
당시 클럽을 채우던 쿨 재즈, 하드 밥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었다.
세실 테일러는 피아노를 선율 악기보다 타악기에 가깝게 다룬다.
리듬을 유지하며 지탱하기보다는

공간 안에 리듬의 입자와 에너지들을

쏟아붓는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평단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갈렸다.

그가 전통적인 타임키핑과 화성 체계를 멀리 던져버린 이유는 명확했다.
그는 일정한 스윙 비트가 아프리카 음악의 다층적 리듬 구조를

턱없이 단순화시킨 것이라고 보았으며,
서구적 코드 진행 역시 즉흥 연주의 자유로워야 할 즉흥성 자체를

미리 규정하여 억압한다고 느꼈다.


이 두 요소는

정작 자유로워야 할 재즈적인 즉흥연주를 억압하는 전통적인 규범이자, 구태적인 형식과 선입견에 갇힌 구속이라 생각했다.

세실 테일러는 점차,

음악을 음표의 연결로 보지 않기 시작한다.
소리를 ‘에너지의 덩어리’, 즉 하나의 "클러스터"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피아노 연주는

음악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물리적인 힘과 시간의 압축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접근했다.


Step - Cecil Taylor


< Unit Structue > 라 이름 붙여진, 이 앨범은

프리 재즈 역사상 가장 치밀하게 설계된 앨범 중 하나이다.

처음 들으면 '소음의 폭풍'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감상의 포인트를 다르게 접근하면

그 안에서 기존에 느끼던 것과는 또 다른 질서를 경험할 수 있다.

기존의 재즈가 하나의 긴 실 같은 멜로디를 따라간다면,

세실 테일러의 음악은

수많은 '음악적 입자(Cells)'들이 부딪혀 만들어낸

수많은 소리 클러스터들의 조합들이다.

하나의 고정된 주제 선율을 찾으려 하기보다,

짧은 동기들이 어떻게 반복되고 확장되는지에 집중하며 들어본다.

앨범 제목처럼 이 음악은

수많은 '단위(Unit)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구조(Structure)'들이다.

피아노, 색소폰, 드럼이 각자의 독립된 건물을 짓는 것처럼

연주하다가 어느 순간 거대한 하나의 도시를 이루는 과정으로 접근해 본다.

세실 테일러는 음악을 '감정의 분출'이 아닌 '에너지들이 이룬 구조물'로 보았다.

소리가 커졌다 작아지는 역동성(Dynamics) 자체가 이 곡의 가장 큰 주제이다.


1960년대 초반,
그는 색소폰에 지미 라이언스, 드러머 서니 머레이와 함께 ‘Unit’을 구성한다.
이 시기의 핵심은 드럼의 역할 변화다.
서니 머레이는 박자를 시간 안에 가두지 않는다.
대신 타악기가 가진 소리의 질감과 밀도로만 접근한다.
이로써 이들 앙상블의 즉흥 연주는

리더와 반주의 관계를 완전히 벋어버린다.
각각의 연주자는 동시에 자기 위치에서 중심이 된다.

연주가 지속되는 동안,

세실 테일러의 음악은 연주자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또 다른 언어로 작용한다.


그들이 선택한 프리재즈는 무질서가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또 다른 소통의 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