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와 알마 그리고 해준과 서래의 사랑에 대하여.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
- [ 헤어질 결심 ]에서 서래의 대사.
헤어짐을 처음 느끼고
그것을 준비하고
헤어짐을 입 밖으로 내뱉은 뒤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많은 것들에 덤덤해진다.
그리고도
한동안 잊힌둣 시간이 흘러
낡고 너덜너덜 해진 후에야
그 헤어짐은 천천히 사그라든다.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작곡 당시, 더없이 깊은 사랑에 빠져있던 구스타프 말러가
일생에 단 하나뿐이던
그의 영혼의 뮤즈,
알마 쉰들러에게 음표로 적어 내려간 사랑의 고백으로 알려진 곡이다.
[ 아다지에토 ]는 수많은 말러의 교향곡들 중에서도 특별히 인기가 많은 레퍼토리이며
수많은 지휘자들이 당대 최고의 오케스트라들과 협연한 연주들이 많은 곡이다.
한때, 이 곡의 연주들에 집착하여 35개, 6시간 4분의 플레이리스트를 직접 만들어
한동안 이 곡만 반복해서 듣고 다녔던 적도 있다.
Adagietto.
사랑하는 이를 위한 벅찬 설레임.
다가가려 할수록 점점 더 애달파지는 외로움
끝내 다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랑에 대한 체념의 아련함까지
음표 하나하나마다,
알마에 대한 말러의 사랑이 구석구석 스며있다.
이 곡에 완전히 빠져들게 된 계기는
2022년, 박찬욱 감독의 [ 헤어질 결심 ]을 본 이후이다.
주인공 해준과 서래의 복잡 미묘한 감정의 변화와 사건의 전환점마다
[ 아다지에토 ]의 선률이 반복된다.
한없이 느리게 물결치듯 흘러가는 현악기들의 섬세한 떨림과
곡의 진행을 재촉하는 하프의 청명한 울림이 어우러져
끝없는 갈망과 순수한 애정이
파도에 뒤엉킨 물결처럼 혼란스럽게
장면 구석구석을 해 집으며 장면 장면 사이로 퍼져나간다.
사랑의 기쁨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슬픔과 상처,
서로가 애써 외면하려는
아픈 이별의 그림자가 뒤섞여 있다.
이 곡이 [ 헤어질 결심 ]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이유는,
말러가 품었던 알마에 대한 사랑의 양면성이
이 영화의 서사에 절묘하게 녹아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속, 주인공 해준과 서래의 관계는,
서로를 갈망하면서도 끝내 닿을 수 없기에,
정해진 비극적 운명을 향해 서로를 떠밀어간다.
현악기의 떨림 가득한 선률은 서래의 복잡한 내면을 닮았고,
하프의 애절한 울림은 해준의 사랑을 향한 인내와 아픔을 그려낸다.
마지막 장면,
바다로 사라지는 서래의 선택 위로 뿌려지는 말러의 선율은,
사랑의 결말이 끝내 이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잔혹한 현실을 부서지는 파도 위에
잔인한 상처들로 수를 놓는 듯하다.
[ 헤어질 결심 ]은 세 번 보았다.
세 번을 반복해 보는 내내,
박찬욱 감독은
서래의 마지막 결심 위에
말러가 품고 있던 알마에 대한 사랑의 역설을
영화로 녹여내고 싶었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가장 순수한 순간에 서로를 떠나보내야 하는 모순,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