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ll Evans - Undercurrent
한참 전이다.
스피커 위치를 바꿔놓고
달라진 소리에 흐뭇해하며
거실 가득 Bill Evans의 [ Darn That Dream ]을 틀어놓고 취해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초등학생 딸아이가
은근슬쩍 끼어들더니
거실 가득 <블랙핑크 핵탄두>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거의 한 시간 넘게 뭘 듣나 내버려 두었더니
결국, 나의 여리고 나약한 귀와 심장은
무자비한 러시아, 푸틴에게 공습당한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시가 중심지에
툭 내던져져 있었다.
극단적인 꼰대의 취향과 귀를 가진 자로서,
온 세상이 한류로 가득 차고
k-pop이 빌보드 차트를 뿌리째, 뒤 흔든다 해도
양자 얽힘의 원리만큼이나 받아들이기 힘든 게
아이돌 음악이 아닌가 싶다.
그 녀석이
요샌, 이쁜 언니들을 버리고
라이즈라는
잘생긴 남자아이돌로 갈아탔다.
재즈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빌 에반스의 죽음을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자살로 표현한다.
사랑했던 여인 엘레인과의 이별
그리고 얼마 후
엘레인은 뉴욕 지하철역에서 투신하여 자살했고
그에 대한 빌 에반스의 자책감
Bill Evans의 대표 명곡 Waltz for Debby의 주인공인 조카 Debby
그리고 그 데비의 아빠이자
빌 에반스의 친형인
Harry Evans의 권총자살로 인한 충격.
마일스를 만난 이후 빠져들었던 마약과의 전쟁
그리고
한때 재기하며 끊었던 마약에 다시 빠져들고
지병인 간염약 투약을 스스로 중단하며
자의적인 죽음으로의 긴 터널로 들어선다.
그렇게 51세의 나이로
지구상에 단 하나뿐일,
밤하늘 별빛 같던 그가
꿈속의 별이 되었다.
Darn That Dream.
Bill Evans의 여러 명반 중 하나인 < Undercurrent >
그가 꿈꾸던 피아노 트리오 완전체의 중심이던
Bassist Scott LaFaro의 요절로
실의에 빠진 삶의 돌파구이자
재기의 몸부림이었던
Jim Hall과의 Duo 앨범.
금세기 최고로 섬세했던 피아니스트와
금세기 최고로 사려 깊은 기타리스트의 만남이
만들어 낸
두 거장의 세심함과 사려 깊음이 낳은 걸작.
공기에 흩뿌려진 기타와 피아노의 음들은
상념의 무게에 녹아내려
끝도 없이 아래로 아래로
의식을 침잠시킨다.
묘한 나른함이다.
진지한 감상을 위해서도
독서를 위한 BGM으로도
더없이 감사한 음반이다.
교양 있는 처지에 Damn이라고 입에 올리기 불편한 사람들이 쓰던 표현?
Darn.
교양과는 나름 일정의 거리를 두고 사는
나 같은 사람의 입을 빌자며
'빌어 먹을 그 노매 꿈 ' 정도 일까?
하지만 이 곡에서의 Darn은 분노나 욕설이라기보다는
애증이 뒤얽힌 어른의 푸념이다.
꿈속의 연인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원망
지워지지 않는 아픈 기억
달콤했지만 잔인한 미련
떠나지 않는 사랑의 그리움
이런 복합적인 감정을 한 단어에 담아 던진다.
Damn,
빌어먹을, 제기랄!
이런 분야의 최강자는 단연
Billie Holiday이다.
재즈 좀 듣는 이들의 말을 빌자면
' 재즈를 살다 간 여인 '
' 삶, 자체가 재즈였던 Billie Holiday '
Darn that dream I dream each night
You say you love me and you hold me tight
But when I awake, you're out of sight
Oh, darn that dream
그 꿈 참 야속해요, 매일 밤 꾸는 그 꿈
당신은 날 사랑한다며, 꼭 안아준다고 말하지만
깨어나면 당신은 보이지 않아요
아, 그 꿈 참 야속해요
Darn your lips and darn your eyes
They lift me high above the moonlit skies
Then I tumble out of paradise
Oh, darn that dream
당신의 입술도, 눈동자도 야속해요
그것들이 날 달빛 하늘 위로 들어 올려놓고
다시 낙원에서 굴러 떨어지게 하니까요
아, 그 꿈 참 야속해요
Darn that one track mind of mine
It can't understand that you don't care
Just to change the mood I'm in
I'd welcome a nice old nightmare
이 고집스러운 내 마음도 야속해요
당신이 관심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이 기분을 바꾸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무서운 악몽이라도 환영할 거예요
Darn that dream and bless it too
Without that dream, I never would have you
But it haunts me and it won't come true
Oh, darn that dream
그 꿈 참 야속하면서도 고마워요
그 꿈이 없었다면, 당신을 가질 수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꿈은 날 괴롭히고, 현실이 되지 않네요
아, 그 꿈 참 야속해요
이 곡은 1939년,
셰익스피어의 < 한여름 밤의 꿈 >을
미국의 뉴올리언스로 배경을 옮겨 각색한 야심 찬 작품이었으나
당시로서는,
10만 달러라는 엄청난 적자를 내고
13일 만에 막을 내린 뮤지컬
[ Swinin’ The Dream ]을 위해 쓰인 곡이다.
루이 암스트롱 주연에
베니 굿맨, 버드 프리먼, 피위 러셀이 밴드로 포진해 있었고
월트 디즈니가 제작에 참여했던 작품인데
망하다니!
게다가,
당시로는 무명의 틴팬앨리 작곡가였던
지미 반 호이젠의 곡 [ Darn That Dream ] 한곡만
이토록 대히트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지미 반 호이젠에게는
[그 노매 제기랄 꿈 ] 같은 기적이
현실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중학생이 된 우리 딸에게는
아빠와 아이돌 콘서트 스탠딩석에서
함께 응원봉을 휘두르는
Darn That Dream 이…
내게는
빌 에반스의 Darn That Dream에 취해
딸아이와 같이 거실 소파 속으로
침잠하는 날이 …
어떤 꿈이 먼저 올 것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 승산이
커지고 있다고 본다.
Darn That 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