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 화양연화 ]
나의 삶 동안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기억은
언제였을까?
[ 화양연화 ]는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감정을 입밖의 언어로 남기지 않아
더 아련한 두 타인의 이야기이다.
누군가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말이 되기 전에 멈추었고,
그 멈춤은
짙게 새겨진 주홍글씨처럼
더 선명한 감정으로 가슴 깊은 곳
어디 즈음에 남겨진다.
이 영화의 전 장면을 통틀어,
두 주인공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장면은 어느 곳에도 없다.
그 사랑은 늘.
빛, 계단, 침묵,
그리고 반복되는 식사와 우산,
그리고
어눌한 발음의 스페인어로 된 노래로 대신한다.
바로 그 노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방인의 목소리.
Nat King Cole.
흑인 재즈 보컬리스트, 백인의 창법,
스페인어 발음의 어눌함.
그의 정체성 자체는 그가 살던 시대의 미국사회에서
탑 스타라는 주류와
흑인이라는 비주류의 경계에 서서
백인의 창법에 흑인의 감성을 담아 노래했듯,
영화 속에서도 연인과 타인의 묘한 경계 위에 서 있는
두 남녀의 미묘한 감정의 경계를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노래한다.
[ 화양연화 ] 영화 속 장면에
이 흑인 가수는 직접 등장하는 주인공이 아지만,
그는 노래와 함께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된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둘의 시작은
고요한 떨림으로 시작했다.
차우 모완과 수 리첸은
매일 같은 시간,
매일 같은 골목에서 마주친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고,
서늘한 공기 속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고른다.
냇 킹 콜의 [ Quizás, Quizás, Quizás ]는 사랑의 고백이 아닌,
사랑의 회피를 노래한다.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라는 반복은
말을 감추기 위한 말이다.
입술을 떠나 그것이 말이 되었다면
그 모든 감정은
산산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투명한 살얼음 같은 감정에 대한
소심한 배려.
들숨에 담긴 미묘한 애틋함은
날숨에는 담을 수 없는 감정이 되어
점점 더 선명해진다.
냇 킹 콜은 이 곡을 스페인어로 불렀다.
그 언어는 그의 모국어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어눌한 스페인어는 오히려 더 진실되다.
완벽하지 않은 말로 완벽한 감정을 전달하려는 시도.
그는 흑인이었고, 백인 청중을 위해 노래했다.
어쩌면 그는 늘 “Quizás”를 말하며 살아야 했던 사람이다.
언제쯤 진짜 나를 노래할 수 있을지,
언제쯤 나로 사랑받을 수 있을지.
두 사람은 함께 소설을 쓰고,
우산을 같이 쓰며,
식사를 반복한다.
점점 더 가까워지지만,
서로의 감정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Aquellos ojos verdes ]
[ 그 초록빛 눈동자 ]는
한 번도 닿지 못한 사랑의 아름다움과 비현실성을 노래한다.
냇 킹 콜은 이 노래에서 부드럽고 매혹적인 음성으로
사랑의 회상이 아닌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대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속삭인다.
그의 달콤한 목소리 안에는
두 주인공의 절제된 욕망이 눌려져 있다.
이 곡이 흐를 때,
냇 킹 콜의 음성을 닮은 두 주인공의 시간은
의식의 가장자리에 흐르는 선율에 실려,
깨어 있는 꿈처럼 흘러간다.
두 사람이 나눈 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말로 대신한 적이 없어
감정으로만 남아 있는
하나의 추상적인 감정의 잔상.
차우 모완은 캄보디아로 떠났다.
수 리첸은 그의 방에 혼자 남는다.
아무도 없는 공간,
그러나
그 모든 잔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 자리.
[ Te quiero dijiste ]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죠”라는 의미이지만,
이 대사는 영화 속에서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냇 킹 콜의 노래로 대신한다.
마치 떠난이가 남겼을 마지막 체취처럼,
그 노래는 사랑의 유령이 되어
방 안 곳곳을 떠돈다.
뜨겁게 불타 올랐던 사랑은 순간을 밝히지만,
설레임에 머뭇거리던 결핍의 감정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천천히 늙어간다.
오래된 나뭇잎 책갈피처럼,
언제라도 펼쳐 볼 수 있게
언제나 그 자리에
잊히지 않고 눌려져 있다.
이 곡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었을 수도 있었던 관계에 대한
마지막 작별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인사를
왕가위는 냇 킹 콜에게 맡긴다.
왕가위의 『화양연화』는
말하지 않은 말들로 만든 영화이다.
감정은 장면의 틈 속을 말없이 흐르고,
고백은 음악을 통해 말없이 파고든다.
냇 킹 콜 역시 늘 무언가를 말하지 못한 채 노래했던 인물이었다.
흑인이었지만 백인 청중을 향해 노래했고,
사랑을 말하지만,
인종차별이라는 세상의 규범과 경계에서
늘 스스로 머뭇거려야 했다.
그의 노래는 왕가위가 말한
“그 시절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말처럼,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더 오래 남는 기억의 한 조각이 되었다.
[ 화양연화 ] 속 사랑이 고백되지 않음으로써
그 추상적인 감정이 영원한 감정으로 남은 것처럼,
냇 킹 콜의 노래 또한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 발음 속에서
더 진실된 감정으로 남았다.
그 시절엔 왜 그랬는지 몰랐던 그 감정들이
지금도 어느 골목길,
눅눅하고 오래된 방,
혹은
한물간 오래된 노래 속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듯
우리 곁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우리 모두, 다들 하나쯤은
인생의 책장에 꽂아 둔
오래된 나뭇잎 책갈피 같은
[ 화양연화 ]의 기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