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가장 대륙적인 이야기다

영화 <콘티넨탈 '25>

by 그린

<콘티넨탈 '25>를 보았다.

그 어떤 정보도 찾아보지 않았고

냅다 스크린으로 마주했다.


영화는 가장 대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퇴거는 개인의 선택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는 이를 초반부터 아주 강하게 말한다. 퇴거는 구조가 개인에게 행사하는 폭력이다. 그리고 그 폭력의 결과로 사람이 죽는다. 그러나 누구도 책임질 수 없으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주인공은 책임의 공백으로 인한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옥죄기 시작한다.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며 무너져간다. 법적으로 아무 책임이 없음에도 죄책감에 매몰된다. 현대인의 초상이다. 집값 폭등, 빈부 격차, 복지 부재 같은 구조적 문제 앞에서 우리는 늘 개인적 죄책감을 먼저 떠올린다.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해부한다.

루마니아 내부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배경을 통해 헝가리-루마니아 갈등이라는 오래된 균열을 계속해서 제시한다. 트란실바니아를 둘러싼 역사적 적대, 소수민족의 정체성 문제, '대륙' 전체가 공유한 상처들이 지금의 주거 불평등과 사회적 불신 위에 겹겹이 쌓인다. 주인공의 죄책감은 단지 그녀가 겪은 사건의 부산물이 아니라 이 오래된 대륙적 균열이 개인에게 전가된 결과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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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솔루션. 개인과 윤리

주인공은 친구를 만나 자신의 일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친구는 자신이 후원하는 단체를 소개한다. 전형적인 중산층식 선행이다.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선행을 소비하고, 죄책감을 덮으려 한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본질은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친구의 선행에 높은 액수로 동참한다. 개인 윤리로 사회 구조를 덮을 수 있는가? 영화의 답은 명확히 '아니다'다.


두 번째 솔루션. 도리와 도피

이어 우연히 마주쳤던 남학생(과거의 제자)과 만난 주인공, 술잔을 사이에 두고 또다시 자신의 죄책감을 토해낸다. 남학생은 불교, 도덕, 도리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결국 그 대화는 웃긴 이야기로 소비되고, 둘의 관계는 주인공 마음속의 빈자리를 막기 위한 욕망적 도피로 흐른다. 제자가 그녀의 구멍을 막아주는 셈이다. 일시적이고 부도덕적인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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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솔루션. 종교와 신

주인공은 신과 종교에 마지막 기대를 걸어본다. 신부의 말은 위로를 준다. 그녀는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 죄책감을 내려놓으라는 전형적인 위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신의 영역에서도 구조적 폭력, 주거 문제, 불평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종교는 개인의 마음을 달래줄 뿐, 현실의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솔루션은 없다는 게 결론이다.

영화는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당신은 해결할 수 있는가?

당신의 죄책감은 어디서 오는가?

구조적 폭력 앞에서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죄책감을 받아들이고 말아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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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겼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과 선택 너머에 있다.

대륙 깊은 곳에 뿌리를 둔 죄책감이

각자의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자라난다.




개인의 능력과 선택 너머에 놓인 대륙적 모순.

이제는 공유 자산이 되어버린 죄책감을 해부하다.

<콘티넨탈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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