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계의 주인> 리뷰
작품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폭행 피해자를 다루었던 기존 영화들은 자극적이기만 했다. 폭행의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그로 인해 망가져버린 피해자의 삶을 그렸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달랐다. 철저히 피해 이후의 삶에만 집중한다. 절대 피해를 당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주인은 스스로가 완전히 극복했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일상 속의 작은 자극은 그녀를 무너뜨린다. 감독은 이 미세한 트리거를 아주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리고 그 결과, 세차장에서 매우 격렬한 분노가 표출된다. 가장 작은 공간에서의 커다란 절규는 다른 어떤 장면보다 자극적이고 강렬했다.
영화 제목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넓디넓은 세계 속 하나의 개인으로서의 '주인', 그리고 자신의 삶의 '주인'. 주인은 성폭행 피해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개인이자, 피해를 극복하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주인이다. 감독은 두 의미 사이의 낙차 속에서 인간의 강함과 약함을 동시에 비춘다. 또한, 그 누구도 피해자 중심의 시선으로 대상화하지 않는다. 남성 인물들 또한 폭력의 도구가 아닌 가능성의 존재로 그려진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 약자성 속에서 서로를 보듬는다. 윤가은 감독 특유의 다정한 시선이 살아난다. 윤가은 영화가 이토록 따뜻한 이유.
모든 캐릭터가 자신만의 균열과 결을 지녔지만, 특히 고민시 배우가 연기한 미도는 유난히 입체적이었다. 미도 역시 친부에게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다. 그녀와 주인의 대화 속 사랑과 용서의 대비는 두 인물의 상처를 드러낸다. 트라우마의 공명. 주인의 동생도 참 매력적이었다. 그의 천진난만한 상처가 뼈저리게 아팠다. 순수한 장난꾸러기가 주인을 성폭행했던 작은 아버지에게 세상 차갑고 단호할 때 슬픔과 분노는 배가 되었다. 그 밖의 인물들도 각자의 상처와 호흡으로 세계를 살아있게 만든다.
주인은 수호 동생의 목에 상처를 낸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 한다를 가르치고자 했던 것. 그러나 정작 본인은 본인의 아픔에 침묵한다. 다음 세대에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을 가르치면서도 스스로의 아픔은 꾹 눌러 참는다.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걸까. 아파도 참고 넘어갈 수 있는 힘을 추구하는 세태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수호의 동생이 주인이 했던 행동을 똑같이 하며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지"라고 외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우리는 아픔을 참을 이유도, 아파야 할 이유도 없는 세계의 주인이다. 그러니까 아프면 아프다고 해.
<세계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