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잡 시리즈 13 - 다시 시작, 그리고 1년 전

by 무토피아

입사 거절 이후에 나는 다시 서류를 넣기 시작했다.


30곳쯤 되었을까. 채용 공고를 보고, 자소서를 쓰고, 지원 버튼을 누르고. 그 과정을 반복했다. 대부분은 아무 소식이 없었다. 몇몇은 정중한 탈락 메일을 보내왔다. "귀하의 역량이나 경험이 부족한 것은 결코 아니며.." 같은 문장들.


낮에는 서류를 쓰고, 저녁에는 식당에서 일했다.


퇴사 후 당장의 생활비를 벌어야 했으니까. 설거지를 하면서도, 서빙을 하면서도, '이력서는 잘 썼나', '오늘 또 탈락 메일이 왔을까'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치는 건 몸보다 마음이었다.


그러다 세 곳에서 면접 제안이 왔다.


첫 번째는 뷰티 브랜드였다.


매출 800억. 해외 시장 진출. 채용 공고를 보는 순간부터 '여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광고를 다루면서 해외 시장에 대한 이해도 높일 수 있는 곳. 커리어적으로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고생은 하더라도 배울 게 많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면접은 팀장과 1:1로 진행됐다. 생각보다 편안했다. 팀장도 사람이 괜찮아 보였다. 나는 최대한 솔직하게 답했다. "힘들더라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진심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탈락이었다.


두 번째는 식품회사였다.


매출 100억 후반대. 재작년에 흑자 전환했다는 정보를 확인했다. 재정이 비교적 안정된 곳. 전 회사에서의 경험 때문인지, 이 부분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면접은 다대일로 진행됐다. 질문들이 꽤 날카로웠다. 경력에 대한 것, 업무 능력에 대한 것. 그런데 인사담당자가 물었다.


"근속 연수가 짧은 편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나의 약점. 이력서를 볼 때마다 신경 쓰였던 부분.


"여러 사정으로 근속 연수가 짧았습니다. 특히 전 회사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퇴사하게 되었고요. 이 부분이 제 약점인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회사에 입사한다면, 오랜 기간 근속하면서 회사의 이익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솔직하게 말했다. 변명하지 않았다.


면접은 1시간 가량 이어졌다. 끝나고 나서 면접비를 지급해줬다. '아, 이 회사는 성의가 있구나' 싶었다. 그래도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무난한 곳. 특별히 가고 싶지도, 가기 싫지도 않은.


세 번째는 사업 분야가 다양한 곳이었다.


두 번째 회사에서 면접을 본 날 식당으로 가는 길에 면접 제의를 받았다. 크게 관심은 없었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다대일 면접. 실무진들의 질문은 무난했다. 그런데 본부장급으로 보이는 사람의 질문은 달랐다. 날카롭고 깐깐했다. '여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분 만에 면접이 끝났다. 딱히 아쉽지 않았다.


합격 통보는 두 번째 곳에서 왔었다.


전화를 받았을 때, 기쁨보다는 안도감이 먼저였다. '아,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구나.'


첫 출근 날짜를 잡았다. 근로계약서를 썼다. 모든 게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첫 출근 날 아침.


회사 건물 앞에서 잠시 멈춰 섰었다.


'오늘부터는 퇴근 후 또 다른 출근이 없다.'


그 생각이 들자, 가슴 한켠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면, 그게 끝이다. 저녁 7시에 식당으로 향하지 않아도 된다. 밤 10시까지 설거지하고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하나의 직장.


생각해보면 참 당연한 것인데, 그게 그렇게 큰 안도감을 줄 줄은 몰랐다.


1년 전, 정확히 이맘때쯤이었다.


아침에 회사 출근, 저녁에 펍, 주말에 식당. 세 곳을 오가며 하루하루를 버티던 때. 월급이 밀리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당장 그만둘 수 없었던 이유는, N잡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N잡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N잡이 저주 같았다.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굴레. 아르바이트가 본업보다 더 믿을 만한 수입원이 되어버린 기묘한 상황. 그 안에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N잡이 없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월급이 밀리는 동안 생활비를 벌어준 것도, 회사를 그만두고 구직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준 것도, 심리적으로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준 것도, 모두 N잡이었다.


세 개의 직장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버틸 수 있는 이유였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었고,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근거였다.


그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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