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조석의 축구만화 때문이었다. 만화를 보면서 축구라는 스포츠가 단순히 공 하나를 차는 게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축구에 눈을 뜨고 나서 자연스럽게 경기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주한 선수가 세스크 파브레가스였다.
입문했던 경기가 정확히 어떤 경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파브레가스의 플레이는 선명하게 기억난다. 공을 받는 순간부터 달랐다. 고개를 들어 필드 전체를 훑고, 상대 수비수들 사이로 실처럼 가느다란 패스를 꿰어 넣는 그 플레이. 화려하지만 정교했고, 빠르지만 정확했다. 그의 플레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축구가 얼마나 아름다운 스포츠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파브레가스를 따라 아스날이라는 팀을 알게 됐다. 10/11 시즌이었다.
결정적으로 팬이 된 건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경기였다. 상대는 펩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 당시 바르셀로나는 메시, 사비, 이니에스타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티키타카로 유럽을 평정하던 최강의 팀이었다. 그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이기도 했다. 누가 봐도 아스날이 불리한 경기였다.
그런데 홈에서 2-1로 이겼다.
물론 경기력적으로는 밀렸다. 아스날이 이긴 게 기적과도 같은 경기였다. 하지만 순간순간 아스날만의 플레이를 해냈고, 그 가운데는 역전골의 기점 패스를 했던 파브레가스와 '이니에스타에 대한 잉글랜드의 대답'이라는 평가를 그대로 증명하는 플레이를 했던 당시 19살 잭 윌셔가 빛이 났다. 물론 클리쉬의 롱패스를 받고 각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동점골을 넣은 반 페르시와 역전골을 넣은 아르샤빈 덕분에 이기긴 했지만, 골을 넣은 두 선수보다 윌셔와 파브레가스가 빛났던 것은 대다수 아스날 팬이 동의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날의 경기는 마치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최강 바르셀로나를 상대로도 아스날은 자신들만의 축구를 했다.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이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그날 느꼈다.
그때 알게 된 말이 있었다. 아르센 벵거 감독의 말이었다.
"나의 꿈은 타이틀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다. 단 5분이라도 아름다운 축구를 지속하는 것이다."
아스날은 아트사커를 추구하는 팀이었다. 승리보다 과정을, 결과보다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기는 팀이었다. 그 철학이 마음에 들었다. 파브레가스의 플레이가 그렇게 아름다웠던 이유도, 비록 2차전에서 바르셀로나에게 져서 16강에서 탈락했음에도 기억에 남은 이유도 바로 그 철학 때문이었다.
그렇게 16년째 아스날 팬으로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입문시킨 파브레가스에 대한 감정은 복잡하다. 그는 주장이었다. 팀의 주장이 자기 사비를 보태서까지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배신감이 들었다. 다행히 파브레가스라는 지휘자를 잃고 잠시 방황했지만 이후에 외질이라는 훌륭한 선수가 벵거의 철학을 이어나갔다.
반면 파브레가스는 사비까지 보태서 바르셀로나에 갔지만 끝내 적응에 실패해서 EPL 복귀를 시도했다. 당시 맨체스터 시티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도 오퍼가 왔는데 그는 첼시를 선택했다. 라이벌 팀으로. 그 이후에 아스날에 대해 좋지 않은 발언들을 하며 미운오리새끼가 됐다.
그래서 파브레가스를 싫어한다. 하지만 그의 플레이는 여전히 좋아한다. 나를 이 세계로 끌어들인 그 화려하고 정교한 패스, 창의적인 움직임. 그건 부정할 수 없다.
애증이다.
하지만 그 애증마저도 16년 팬질의 일부다. 파브레가스의 플레이로 시작해서, 벵거의 철학으로 뿌리내린 이 팬심은, 갈대처럼 위에는 흔들릴지 몰라도 땅에 단단하게 뿌리 박힌 채 뽑히지 않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