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스날의 월요일 새벽은 끔찍했던 경기들이 많아서 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끝내 잠을 선택했다. 그리고 최근 첼시는 어지간하면 잡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어서 그냥 잠에 들었다.
일어나서 확인한 결과는 2-1 승리였다. 그러나 막상 경기 지표는 썩 좋지 않았다.
아스날 2-1 첼시.
점유율은 42 대 58, 코너킥은 5 대 10. 모든 숫자가 첼시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런데 에미레이츠의 붉은 물결은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21분 선제골, 전반 막판 동점을 허용했지만 66분 다시 앞서며 그대로 경기를 끝냈다. 효율이었다. 유효슈팅 5개로 2골, 첼시는 유효슈팅 2개로 1골. 지배하는 팀이 이기는 게 아니라, 결정하는 팀이 이긴다는 걸 다시 한 번 보여줬다.
더럽고 안티 축구라는 소리마저 듣고 있는 상황이지만, 결국 세트피스에서 승부가 갈리게 되었다. 세트피스로만 넣은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못 이기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이기는 게 팬 입장에서는 낫다. 한때 아름다운 축구를 하다가 두들겨 맞고 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서, 그럴 때마다 샷건을 내리쳤던 것보다는 씁쓸하지만 이긴 게 더 좋긴 하다.
거기에 보너스가 붙었다. 네투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 이번 시즌 첼시가 리그에서 받아낸 퇴장만 9번째다. 프리미어리그 단일 시즌 최다 퇴장 기록과 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까지 세우게 됐다. 경기도 지고, 선수도 잃고, 역대급 불명예 기록까지 쌓았다. 여기에 더해 다음 경기인 빌라전에는 전문 좌측 윙어가 가르나초 한 명뿐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첼시 팬들에게는 악몽같은 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결과가 더 흥미로운 이유는 따로 있다.
첼시가 아스날을 마지막으로 이긴 게 언제인지 기억하는가. 2021년 8월 23일. 루카쿠가 막 첼시로 돌아와 데뷔전을 치른 그 경기, 리스 제임스의 골까지 더해져 2-0 완승을 거뒀다. 당시 아스날 팬들은 꽤 우울한 여름을 보냈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첼시는 아스날을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까지, 아스날은 첼시만 만나면 그냥 졌다. 무리뉴가 첼시에 처음 부임한 이후부터 2020년대 초까지, "아스날 vs 첼시"는 결과가 보이는 경기나 다름없었다. 드록바가 버티고, 테리가 막고, 무리뉴가 웃는 그림. 아스날 팬들에게 런던 더비는 설레는 날이 아니라 각오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뒤집혔다.
두 클럽의 운명이 엇갈린 시점을 짚어보면, 묘하게도 한 사람의 퇴장과 겹친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다. 러시아 국적의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서방의 제재 대상이 됐고, 결국 첼시를 반강제적으로 매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그렇게 적극적인 투자를 약속했던 보엘리-에그발리 컨소시엄이 첼시를 인수했다.
로만이 그립다는 첼시 팬들의 말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그가 남긴 유산은 숫자로도 명확하다. 두 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 수차례의 리그 우승과 컵 대회 우승. 로만 체제의 첼시는 프리미어리그를 넘어 유럽에서도 강팀으로 군림했다. 결정적인 순간 냉정하게 감독을 경질하고, 그 자리에 명장을 앉혔다. 매 시즌 우승하지 못하면 실패한 시즌으로 봤고, 그 기준에 맞는 인물을 찾아 데려왔다.
지금의 첼시는 그 기준 자체가 사라진 팀처럼 보인다.
보엘리-에그발리 체제의 첫 번째 결정이 상징적이었다. 두 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안겨준 투헬을 시즌 초에 경질하고, 그 자리에 그레이엄 포터를 앉혔다. 결과는 중하위권 추락. 이후에도 감독 선임 패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루이스 엔리케나 나겔스만처럼 검증된 성과를 가진 감독이 아니라, 포체티노처럼 한때 유망했던 감독, 엔조 마레스카처럼 가능성을 보인 감독을 택했다. 그리고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경질했다. 수천억을 쓰면서도 그것을 결과로 연결시키는 판단력이 빠져 있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첼시다. 챔피언스리그 진출조차 불확실한 시즌을 보내고, 리그 최다 퇴장이라는 불명예 기록을 쌓는 팀. 한때 유럽을 호령하던 클럽이 이제는 런던 더비에서도 4년째 승리를 챙기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정확히 그 시기, 아스날은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구너 입장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이 시간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7년 동안 밟지도 못했던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 챔스 최다 우승팀인 레알 마드리드를 8강에서 격파하고 16년 만에 4강에 올랐다. 비록 최종 우승 트로피는 손에 닿지 않았지만, 그 여정 자체가 이미 몇 년 전의 우리 팬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리그에서도 마찬가지다. 준우승, 또 준우승. 답답하게 느껴지는 시즌도 있었지만, 방향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르테타가 팀을 잡은 이후 아스날은 끊임없이 우상향 중이다. 코시엘니, 메르테사커 이후 늘 불안했던 센터백들은 이제 살리바, 마갈량이스가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고, 탑급 수비형 미드필더인 라이스가 첼시, 맨시티 대신 아스날로 와줬다. 이게 현실인가 싶을 때가 진짜로 있다.
첼시가 유망한 선수들에 투자할 때, 아스날은 검증되고 많은 팀들이 군침을 흘리는 자원들을 영입하는 데 썼다. 그 차이가 지금 이 런던 더비 4년 무승이라는 숫자로 쌓였다.
어쨌든, 런던은 오늘도 붉었다.
토트넘을 4-1로 꺾은 데 이어 첼시까지 2-1로 잡았다. 런던 더비 2연승. 강등을 걱정하는 토트넘,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빨간 불이 들어온 첼시와는 대비되는 행보를 걷고 있는 아스날의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은 오늘도 아스날의 깃발이 펄럭이며 다시 한번 붉게 물드는 밤이었다.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다. 손흥민과 케인이 버티던 시절, 토트넘전만 되면 괜히 불안했다. 첼시전은 더했다. 비기기라도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토트넘과 첼시를 만나면 이기는 건 당연하고, 비기면 화가 난다. 이 변화가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챔피언스리그 진출도 힘들었던 암흑기를 지나, 이제 리그 우승을 노리는 팀이 됐다. 오랜 기간 언더독으로 버텨온 시간을 생각하면 팀의 체급이 올라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이번 시즌 런던 내 라이벌인 첼시와 토트넘을 상대로 거둔 성적은 3승 1무. 오래 전 London is Red라고 했을 때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던 것처럼, 다시 런던의 주인으로, 그리고 프리미어리그의 우승자로 군림하는 아스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나의 바람일 뿐만 아니라 모든 구너들의 염원일 것이다. 리그 38라운드가 끝났을 때 모든 구너들이 이 구호를 외치면서 기쁨을 만끽하길 바랄 뿐이다.
London is 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