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예전에 드라마를 보면서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그저 드라마라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도 이런 말이 오고 갈 때가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제가 했던 말이기도 하고요.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읽기만 해도 화와 분노가 느껴지는 이 말을 했던 시절은, 제 안에 억울함이 많을 때였습니다.
'왜 나만', '왜 나한테'
작은 사건의 기록들이 쌓여 서운함과 억울함이 되었어요.
그 감정의 덩어리는 결국,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 말이 바로, "어떻게 그럴 수 있어"였죠.
지금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 살다 보면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일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을 만큼
저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요.
자기중심적인 삶은 이기적인 삶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기적인 삶은 나의 이득을 위한 삶이지만, 자기중심적인 삶은 이득과 상관없이 모든 상황을 내 중심(관점)으로 해석하는 삶입니다.
이기적인 삶은 나의 이득을 남에게서 취하는 삶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은 남은 없이 나만 존재하는 삶이라는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라는 말은, 타인은 없이 나만 보는 삶의 틀을 버리지 못해 힘든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였습니다.
결국 그 말의 의미는 '나만 보지 말고, 타인의 입장도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관계에서 부딪히고 어려움을 겪어가는 과정은 그걸 배우기 위한 과정이었고요.
삶이 되기 위한 배움에는 힘겨움과 아픔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배웠을 때 제가 했던 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는 "그래, 그럴 수도 있지"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그 말은 제 세계를 넓히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사고의 세계가 확장되면, 남과 나의 경계는 서서히 흐려집니다.
너의 일이 나의 일이 되고, 누군가의 일이 우리 삶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죠.
삶은 여전히 어렵고 힘든 부분이 존재하지만, 인정과 수용의 영역이 커지는 거예요.
편안하다는 건 그런 거였습니다.
힘듦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수용이 커지는 거요.
다양한 사람과 만난다는 건 그만큼 많은 세계를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세계는 계속 확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힘듦과 어려움도 계속되겠지만, 이제는 그걸 통해 내가 크고 성장함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 기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