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야마 여행 후, 일종의 여행에 관한 조각 글

<여행이 남긴 생각의 잔해들>

by 춘고
귀환에서부터 말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대하여.

한 번의 여행이라는 복합적인 과정 중에서 귀환이 시작되는 시점을 어디부터일까.

만일 귀환의 규정을 여행에서 돌아온 자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의 자신을 그리워하는 순간부터라고 정한다면, 여행은 언제나 귀환에서부터 말해져야 할 것이다.


그리움은 필연적으로 기억을 동반한다. 당신이 여행 중 겪은 시공간적 감각이 무의식을 거치며 언어화되지 못한 채 이미지 기억으로 남겨졌다 하더라도, 귀환 후 겪게 될 그리움이라는 감정적 동력에 의해 여정의 기억이 수복되는 과정 속에서 여행은 비로소 언어화된다.

따라서 하나의 여행에 있어 최초의 그리움이 귀환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귀환은 언어화를 마친 여정의 기억들이 일상세계와 결합되는 ‘구체화 과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을 언어로써 말해야 한다면, 귀환을 앞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여행의 소유.

여행을 소유할 수 있을까? 여정지에서 만난 빛과 바람, 사물, 음식의 맛, 그리고 디뎠던 대지… 그것들은 나에게 어떻게 소유되어 있을까. 혹은 소유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맞을까?

여행의 증거품을 남기지 않았다고 하여 경험적이든 관념적인 방식으로든 나를 지나간 하나의 여행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또는 여행의 존재 방식을 ‘현상’으로 분류하는 것이 맞을 것도 같다.

만일 여행의 존재성을 현상으로 본다면 현상이라는 특성상 실체는 소유할 수 없고, 다만 기록이라는 복제본으로써만 여행의 일부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 그랬듯, 전뇌화된 영혼을 복사하고 나면 고스트가 손상되며 복사복이 탄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행의 실체를 담지 못한 사진이거나, 구체적이고 장황한 글로써 여행을 겨우 회상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럼에도 그것을 소유라고 한다면, 여행의 소유는 소유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소유하는 것일 게다.



실재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기록으로.

물리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어도 여행은 그 자체로 기억의 금광과도 다름없다. 그래서 일상으로부터 멀리, 그리고 깊숙이 유폐되어 있다.

마치 에코가 나르키소스를 끊임없이 갈망하듯, 일상은 언제나 여행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여정 속에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영원한 상호적 타자다.

여행지에서의 기록은 그런 결핍으로부터 발생하는 생산물 같은 것이며, 수많은 여정지를 지나는 동안 셔터에서 손가락을 떼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따라서 여행 중 체험한 순간과 새겨지는 기억을 어떤 식으로든 기록으로써 남기려는 욕망은 어쩌면 여행자의 육체가 여행지에 머물렀음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닌, 여행자의 육체 속으로부터 여행지가 떠나가는 과정에서 산란된 기억의 교란현상 같은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기록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

여행이라는 실재와 1차적으로 먼저 맞닿았던 기억도 결국 실재의 복사본에 불과한 것이며, 또한 2차인 기록은 기억의 에코다.



성에 대한 단상
마쓰야마성 전경

마쓰야마 성은 12 천수, 즉 에도 시대 이전부터 막부 말기까지 건립된 성 중에서도 복원 없이 과거의 상태 거의 그대로 천수각이 남겨진 몇 안 되는 성들 중 한 곳이다.

여행을 하며 지나치는 여러 문화제들이 있겠지만 건축물 중에서도 규모가 거대한 건축물은 일반적인 유물들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시간이 응집되어 있는 것들은 응집된 시간의 이름으로 웅장해진다. 현존하는 그 누구도 살아본 적 없는 시간을 온통 내리 맞으면서도 여전히 거기에 있고 거기에 있는 것에서부터 의미가 발생하는 '장소성', 또한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한 지역 전체를 지배하고 규정짓는 대표성은 대체로 거대한 건축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점유하는 공간과 누적된 시간의 의미가 어떤 이에게는 성스러운, 다른 누군가에게는 숭고한 그 무엇이 끝내 되고야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게 되는 순간 오히려 성은 현실로부터 소외된다. 성은 어느새 자신의 탄생과 함께했던, 그리고 전성기를 함께했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초과하였고, 반대로 현대의 사람은 결코 닿지 못할 시대 속에 미달되어 있으므로 성은 언제나 중간의 시간 틈에 놓여있다.

그래서 주인을 잃은 성들의 밤은 언제나 어둡고 언제나 외롭다.



여행지에서의 음식


마쓰야마에서의 다양한 음식들

여행은 어쩌면 다른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다.

지역마다 시간이라는 동일한 재원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쌓아간다. 하나의 개체에 시간을 다르게 할애하는 만큼 종류는 다양하다. 지역별로 시간과 관심의 차이가 만들어낸 다양한 경험적 산물들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여행에 대한 행위적 규정이 아닐까.

여행 중 마주하는 수많은 다양함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아보자면 단연 먹거리가 아닐까.

’ 먹는다’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여정을 하는 동안 단지 보거나 만지는 것을 넘어 자신의 육체 속으로 직접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바로 음식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음식이 식도를 지나 나의 육체 속을 흘러가는 동안 그 음식은 나의 영혼의 일부가 될 수도, 어쩌면은 나의 언어가 되어 발화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살아온 곳이 아닌 또 다른 시공간적 질서 속에서 빚어진 어떤 음식이 내 육신 안에서 그 무언가로 체현되어 가는 것임을 상상해 본다면 여행 중 마주하는 음식은 단순하게 먹는다는 행위가 아닌, 한 지역의 무수한 시간과 질서 같은 것들이 내 혈관 속으로 퍼져나가는 어떤 숭고함 같은 것일 게다.



재귀적 일상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재귀적 상황을 맞이한다.

조금씩 변주되며 달라졌다가도, 또다시 비슷한 리듬으로 수렴되는 과정을 통해 일상은 진동한다.

일상이라는 거대한 인생의 기둥 속에서 여행은 그 수많은 사소한 진동, 자그마한 실금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성 안에서 성 밖을 바라볼 때가 다른 것처럼 자신의 일상을 잠시라도 일상의 밖에 서서 조감할 수 있게 하는 경계선 도달 해보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그 소중한 순간을 의식의 차원에서가 아닌, 감각의 차원에서부터 느끼는 일종의 본능적 행위로써 실제와 기억, 그리고 기록 중에서도 가장 하위 단계인 기록이라도 남기고 싶은 욕망이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지금 내가 일생의 일부를 활용하면서 여행에 대한 기억과 느낌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