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로써 존재하는 존재들>
존재는 오로지 존재자라는 방법론으로써 '현재'에 실재한다.
미래는 과거의 증명이며, 과거는 현재의 준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오직 '현재'라는 실재에 유폐된 존재들에게 있어 과거와 미래는 결코 그들이 닿을 수 없는 경계이며, 단지 관념적인 예감만 가능하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로부터 격리된 추상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단지 인간의 눈으로 바라본 통시적인 관점에 지나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물음인 '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없다.
어째서 존재는 현재에 내던져 있어야 될까?
그리고 왜 무(無)가 아닌 유(有)였을까? 그저 없어도 되었을 텐데..
하염없이 압도적인 실재 속에서 현존재의 유지를 위해 무엇이든 먹고 있지만, 그럼에도 존재해야 할 이유는 규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존재는 '우연히' 여기에 있다.
'구토'의 이야기 속 '앙투안 로캉탱'은 그 사실이 한없이 슬프다.
존재들은 매일 조금씩 자신의 사체에 하염없이 닮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삶'이라고 한다.
대체로 존재 이외의 나의 경험적 기능을 소거하고 나면, 아마도 유일하게 내가 가진 능력은 당신과 다르다는 것일 게다.
존재는 결국 국적 없는 병사다. 그래도 흘러갈 수밖에 없다고.
처량하게 던져진 삶이라는 이유로 여기에.. 생애를 소비하며 산다.
나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것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자신을 파멸시킬 뇌관을 타인에게 쥐어주는 것이다.
자신의 뇌관을 타인의 손에 쥐어 준 적이 있는가?
삶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란, 나의 치명에 거처한 자가 될 것이다.
존재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존재이나, 한 존재와 생멸을 같이 하는 것은 비존재(의식)이다.
‘cogito, ergo sum'
수전 손택의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그가 지적하고자 했던 건
우리가 세상을 직시하는 것이 아닌 '은유'로 해석하는 것에서부터 진실이 왜곡된다는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예증으로써 사람들이 '에이즈'는 그저 질병이 아닌 '성의 타락'으로 왜곡하였고,
'암'은 한낱 인간의 삶에서 발생되는 자연스러운 질병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자기 관리의 나태함을 탓하는 은유를 덧씌움으로써 대상을 본질을 흐린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단지 A를 A로 직시해달라는 '투명성'을 강조한다.
우리의 은유적인 시선은 비단 질병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만 갖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은유하며, 본래의 자신이 아닌 직업과 능력 뒤에 자신을 감춘다.
자신의 본연적 존재는 방치한 채
판사로서 존재하며, 부장으로서 존재하며, 의사로서 존재한다.
그 모든 자신의 은유가 모든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지만,
결국 또 하나 자신을 닮은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음악대장'은 한 번도 '하연우'가 아닌 적이 없었으며, 나는 한 번도 타인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현실은 몽매(夢寐)하며, 타인의 꿈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는다.
결국 가면을 벗고 나서도 '나'인걸..
가면 뒤에 유폐된 존재를 언젠간 게워낼 순간이 올까? 목이 말라 허무하게 삼킨 마른침에서 피 맛이 나는 것처럼 내 안의 이질(異質)을 대면할 자신이 있을까?
A = A라는 건 쉽고 단순한 명제다. 하지만 존재 명제로서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