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된 세계에 제안된 세계>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검은 화면으로 전환되어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는.. 그런 영화들이 가끔씩 있다.
이 영화를 처음 본 2016년, 벌써 6년이 지나는 동안 이 영화의 테마곡이었던 ‘On the Nature of Daylight’을 수없이 들으며 그때마다 영화의 장면들을 되새김질했었다.
영화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원제는 ‘네 인생의 이야기’이며, 소설의 원작자는 ‘테드 창’이고, 단편소설을 전문으로 집필하는 작가이다.
여느 날처럼 또다시 이 영화의 테마곡을 듣다가, 느낌이 와서 결국 이렇게 영화에 대한 감상평까지 쓰게 되었다.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과학법칙으로서 원작 소설에서는 이 원리를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룬다.
문과이자 예체능 계열인 내가 당연히 이 과학법칙은 잘 모르지만 어설프게 서술해 보면, 빛은 자신의 경로를 방해하는 매질을 통과할 때 굴절이 되는데, 매질 속에서 진행 속도가 느려지는 대신 굴절되는 각도가 가장 적은 시간이 걸리는 효율적 경로(각도)를 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기한 현상은 빛은 어떻게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선험적으로 파악하였는가에 대한 것인데, 인과율에 준거하는 선형적인 인간의 사고로는 이미 출발 직전에 경로를 숙지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빛이 인간처럼 이성을 가지고 동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점이 이 원리가 신기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데, 빛은 우리의 의구심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효율적으로 나아가며, 판단과 움직임은 동시적이다.
그것이 그저 빛이 가진 본연의 속성일 뿐... 이것의 이해는 한낱 인간의 몫이다.
종종 우리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 했을 때 ‘차원이 다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기서 차원이라는 쓰임은 그동안 없었던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차원’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가지는 중의적 속성은 ‘새로움’이라는 표현과 동시에, 직접 발현되기 전까지 우리가 닿을 수 없는 한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흔히 인간은 상상하는 동물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상상하는 것이다. 라며 자찬하는 온갖 수식들이 무색하게도 현실적인 인간의 인식적 한계는 언어의 지배력에 매우 무력하다.
장구한 시간 동안 언어에 길들여진 인간의 사고는 대상을 언어로 규정하는 체계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심지어 상상이 시작되는 방향조차 무의식의 영역에서 언어를 읽어 들이는 방향성에 구속된다. (왼쪽에서 나타나 오른쪽으로 멀어지는...)
언어가 정립되기 전의 원시사회에서 그려졌던 동물 벽화는 그 형태가 상당히 사실적이었으나, 오히려 언어가 어느 정도 정립된 후 그려진 벽화는 대상의 각 부위가 언어적으로 개념화되어 그림의 형태 또한 단순해지기도 하며, 비근한 예로 어린아이들의 그림은 언어적 개념으로 그림을 인식하기 때문에 머리, 눈, 코, 입의 선명한 개념들만 추출하여 그린다.
(실제로 그림에 능숙한 미술가일수록 대상을 언어적으로 구별하는 형태에서 벗어나, 거시적인 빛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나간다.)
이처럼 인간의 인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차원이 될 수 있으며, 시간의 개념 역시 하나의 고착된 차원으로서 인간은 시간을 1차원의 비가역적인 선형의 흐름으로 인식한다.
영화는 다른 차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외계 생명체(헵타 포드)와 대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루이스(주연)의 차원 획득, 즉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과정을 그린다.
외계 생명체 ‘헵타 포드’는 그리스어로 '7'을 나타내는 헵타(hepta)와 다리를 뜻하는 '포드(pod > foot)'로서 일곱 개의 다리를 가진 자가 된다.
그들의 차원에서 인식되는 시간은 동시적이라서 시작과 끝의 개념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개념은 비단 시간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외형적 형태(방사형으로 나열되어 있는 일곱 개의 눈과 다리)도 동일하게 구성된다. 때문에 그들의 신체 역시 앞과 뒤의 구분성이 없으며, 그들의 사용하는 문자 역시 비선형적인 원의 형태로 구성되어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고, 동시에 쓰였다 동시에 흩어진다.
이러한 상징을 나타내는 단서로서 루이스의 딸 이름인 ‘한나(HannaH)’의 스펠링도 앞과 뒤의 구분이 되지 않는 비선형적 구성으로 되어있다. (거꾸로 해도 이효리 같은 거지.)
원작자(테드 창)와, 감독(드니 빌뇌브)은 이러한 비선형적 개념을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루이스가 한나(딸)를 추억하는 순서조차 선형적 시간에서 벗어나도록 표현하였다.
이 방식은 영화와 소설 모두 사용되는데, 일반적인 인간이 과거를 추억(기억)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헵타포드의 능력을 획득한 루이스는 현재와 과거를 동시적으로 살아가며, 단순히 한나에 대한 추억을 넘어서 모든 생을 동시에 살게되는… 어쩌면 모든 삶의 선험적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거기에 이건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영화의 테마곡 ‘On the Nature of Daylight’을 들어보면, 곡의 중간지점부터 듣더라도 전체적인 기승전결 중 어느 지점인지 알아채기 모호한 반복적 선율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도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작품 본연의 의도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만약 당신은 자신의 미래를 선험적으로 알게(경험하게) 된다면, 여전히 그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지금처럼 인과율적인 시간의 선형적 체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헵타포드가 가진 시간개념 속에 놓이게 된다면? 그래서 앞으로 다가 올 그 모든 미래를 이미 알아버린 상태에서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면? 혹은 더 나아가 이미 결정된 미래가 비극이라는 사실 마저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삶을 긍정할 수 있을까?
실제로 영화에서 표현하고 있는 헵타포드는 가능한 최소의 동작만을 행위함으로써 호기심이 상실된 존재로 표현된다. 또한 극 중 인간의 공포심이 공격으로 이어져 결국 헵타포드 한 기가 사망하기에 이르지만, 나머지 헵타포드는 이미 선험적으로 동료의 죽음을 알고 있던 탓인지 동료의 안타까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무심한 듯 보이거나, 오히려 동료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인간을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그들의 모든 행위에서 어떤 두근거림이나 진폭같은 떨림들을 읽어내기는 어렵다.
그들은 분명 살아있지만 마치 살아있지 않은 사물(死物)들처럼 그저 거기에 놓여있는듯 하다.
그런 헵타포드들의 모습을 말미암았을 때, 어쩌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기대하고 긍정해 볼 수 있는 요소는 불확실성, 즉 ‘호기심’의 발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호기심이 거세된 삶을 상상해본다면… 글쎄? 나로서는 차원 밖의 불가지론의 영역이라 뭐라 말하기 어려울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약 긍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지점에서 니체가 말한 ‘영원 회기’가 떠오른다. 현재 차원에서 살아가는 내가 상상해 본 헵타포드의 삶은 일종의 ‘불멸’이며, 니체가 제시한 ‘영원 회기’처럼 무한히 반복되는 삶과 매우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니체의 저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면, 자라투스트라가 '말종 인간'(새로운 인류가 탄생되기 전 마지막 세대)에게 이렇게 말하는 구절이 나온다.
“나의 삶이 죽어서도 똑같이 반복된다면, 그대로 다시 살 수 있는가?”
니체는 이러한 반복적 삶을 일종의 비극으로 보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시 태어나 전생과 한 치도 다름없는 삶을 살다가 또다시 오늘이 도래하여 지금 또다시 이 글을 쓰고, 이후 전생과 동일한 사건을 관통하며 매번 같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 한치도 다르지 않은 삶을 무한히 반복한다.
니체는 이런 허무적이며 비극적인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신(god)'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삶의 권한을 갖길 바랬고, 삶에 대한 긍정의 이유를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의 내부에서 찾길 바랬다. 그가 내세운 ‘힘에의 의지’, ‘위버맨쉬’를 향한 열망은 일종의 자신에 대한 다짐, 채찍질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운명에 대한 사랑.. 즉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는 그의 철학처럼 자신의 삶을 애도하고, 긍정하는 태도가 이 작품에서 제시한 결정론적 세계관에서의 가져야 할 필수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원작 소설 첫 장 도입부의 독백을 보면, 루이스가 아이(한나)를 가지고 싶어 하는 고백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시작부터 이야기의 모든 끝(한나의 죽음과 남편과의 이별)을 알고 있고, 그것이 의미하는 슬픔의 무한한 반복 속에서 마저 삶의 가치를 긍정하고 있는 독백은 이 작품을 반복하여 다시 읽게 되는 그 순간에 가장 빛나게 느껴질 것이다.
<네 아버지가 지금 내게 어떤 질문을 하려고 해. 이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에 새겨두려고 하고 있지. 그이와 나는 밖에서 디너쇼를 보고 방금 돌아온 참이란다……… (중략)... 이윽고 네 아빠는 이렇게 말해. “아이를 가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