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의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
간만에 찾아온 음주 글쓰기.
밤의 정적과 어둠, 고요가 전등의 불빛을 가린다.
희미한 전등불을 뒤집어쓰며, 취기에 몇 글자 남겨본다.
삶은 이미 살아져 있다. 마치 턴테이블의 LP판처럼 되돌아갈 수 없고,
꿈의 시작처럼 정신이 들고나면 생은 실천 중이다.
우리는 삶을 자각하기 전부터 이미 살아내고 있었으므로, 삶이란 감당의 다른 발음이다.
그 선상에서부터 우리는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
'우리는 왜 사는가?'가 아니라 '어째서 살아지고 있는가?'
내가 아는 한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를 분류했다. 그는 '존재자'는 존재의 방식, '존재'는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근거라고 서술한다.
때문에 우리는 존재자에 앞서 존재를 선(先) 명제로 두어야 하며, 존재를 시간에 녹여 대상을 탐구할 수 있는 '현존재'로 정의함으로써, 존재가 존재의 방식으로 행위하고 있는 '지금 시간'에 의미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까뮈의 페스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이 요청되지 않는 세상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실존의 존재자들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기능적으로 존재하려는 자신의 허울을 벗고,
처음 세상에 던져진 상태였던 것처럼, 기능을 소거한 실존된 나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
페스트로 인해 붕괴된 사회의 체제 인간의 기능적인 본질을 벗겨지고, 체제로부터 고립되어 유사 자연상태에 내던져진 실존하는 존재가 되어, 그 실존의 공정함으로부터 발견되는 인간 이성의 도덕성..
즉 신의 존재 없이 순수한 인간의 이성과 도덕만으로 삶을 감당하는 삶이 '실존하는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가 그려낸 현실에서 페스트는 현존재가 감당해내야 할 알레고리적 장치이며, 인간의 도덕률에 관한 표본적 시험이라 할 수 있다.
신이 몰락된 이후의 세계, 신이 더 이상 정의 내려줄 수 없는 세상에서도 시간은 동일하게 흐르고 있으며,
그 시간을 묵묵히 감당하는 인간, 그들의 도덕은 단지 나와 타인이 같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나아가 인간의 이타심과 이성은 비록 남루하여도 리힐리즘이 뒤덮은 세상을 극복하는 희망적 알레고리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실존 인간의 서사를 담은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