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패왕별희 [리뷰]

<잡설로 시작하는 패왕별희 후기>

by 춘고


- 잡설


고리타분한 말이지만 살아온 날들이 누적될수록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말을 갈수록 신뢰하게 되더라.


우리는 어릴 적부터 많은 것들을 어른들로부터 강요받지 않던가?

당연한 공부와 더불어 한 묶음의 올 컬러 백과사전, 마음의 양식이라며 누가 정했는지도 모를 세계문학전집 등 각종 고전문학을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필독서라며 어떤 임무처럼 부여받고는 했다.


물론 그 시절 어른들의 조언대로 그것들로부터 쌓은 마음의 양식들이 성인이 될 때 좋은 자양분이 될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렸을 그 무렵 습득했던 지식들은 글자 그대로 <어린 지식>인 경우가 의외로 많더라.


그러한 지식들은 대개 아직 생각이 온전하게 정립되지 못한 어린 친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선과 악, 명과 암의 구분을 선명하게 각색하여 독자에게 지식을 흡수시킨다.


쉬운 예로써 어릴 적 읽은 '심청전'을 들어보면, 심청전의 감동 포인트는 눈이 먼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의 효심에서 비롯한 희생이라 할 수 있다.

성인이 되고 나이가 더 들고나서 이 내용 다시 생각해보면, 어린시절과는 다르게 수긍할 수 없는 지점들이 하나둘씩 생겨난다. (어린 시절에도 온전히 수긍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심청이의 그런 인신적인 희생이 과연 최선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심청이가 그렇게 죽고 나면, 딸을 잃은 심봉사의 허망함과, 딸의 희생으로써 자신의 시야를 획득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죄책감은 그의 남은 세월 동안 감당하며 살아가야 할 텐데, 그것이 과연 최선인가?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불효가 아니었을까? 하는 관점이 생긴다.


지식은 새로운 발견과 지식인들의 지속적인 연구들로 인하여, 언제나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꾸준한 업데이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특히 성장하고 나이가 들어 생각이 입체화 된 후에는 어린 시절 습득했던 지식을 다시 리마인드 하며 자신의 성장에 따른 다양해진 관점에서 재정립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적 교육방식은 뒤돌아 볼 수 없는 직선형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보통 어릴 때 한번 습득한 지식을 다시 반추하여 지식을 재정립해본 적이 얼마나 있던가? (성인이 된 이후로 심청전이나 흥부전, 어린 왕자 등을 다시 읽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나?) 아마도 과거에 한번 지나온 지식은 다시 호기심이 잘 생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성장기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지식은 나이에 관계없이 언제나 꾸준히 업데이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이를 먹어 갈수록 점점 강렬히 느낀다.


패왕별희에 관한 이야기에서, 굳이 이런 잡설을 한 이유는 경우에 따라서 어떤 지식은 오히려 나이가 든 후에 접하는 게 다행이라고 느껴지는 경우가 의외로 많고,

특히 문화/예술 방면에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더 많았는데, 어렸을 적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흘려보내거나, 작가의 진정한 의도를 깨닫지 못한 채로 스쳐봤던 미술, 영화, 소설 등은 나중에서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감탄하는 경우가 잦았다. 어떨 때는 이 작품은 어렸을 때 안 보고 지금 보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든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보통 한 번 보고 나면, 나중에 잘 안 보게 되니까. 이미 그 작품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지)


이러한 연장선에서 <패왕별희>는 지금의 나에게 적절한 순간에 다가온 듯하다.


- 운명론 / 결정론적 생애, 그 연장의 <패왕별희>


삶은 직물처럼 짜여있는 복잡한 사건들의 집합이지만, 결국 직물을 이루는 씨실과 날실처럼 자신의 경로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가? 스스로 '자유의지론자'라고 천명하더라도 당신이 어떤 영화나 소설에 흥미를 느낀다면 당신은 순혈적으로 '자유의지론자'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소설이나 영화가 가지는 '하나의 스토리'라는 것은 이미 결정론의 집약체로서, 당신은 소설과 영화라는 결정된 세계관에 흥미를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각본대로 진행되고, 사람들은 그런 영화를 보며 이미 짜임세 있게 결정되어있는 이야기에 의식을 맡긴다.

영화 속 내용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관객은 이야기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

영화의 본질은 '비가역적'이다.

데이'와 '우희' 그 중간의 존재


<패왕별희>라는 영화 속, 그 안에 주인공으로서 열연하는 한 남성이 있다.

이름은 '데이(두지)' 그는 '장국영'이라는 현실의 배우로서 영화 속에서 '데이'라는 이름의 경극 배우로 분(扮)했고, 경극 배우로서 서초패왕 항우를 연모하는 '우희'에 분했다.

영화 안에서 그려지는 그의 성향은 극렬히 수동적이며, 경극 배우라는 직업처럼 그의 현실의 삶 마저 배우로서 분하는 '우희'의 캐릭터에게 침식된 삶을 살아가는 남성으로 다뤄진다.


'데이'는 자신의 기원에서부터 삶을 주도적으로 선택한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의 친모에게는 의도치 않던 임신이었으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고, 아무도 원치 않을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졌으며, 친모에 의해 손가락 한 개가 잘려나가며 원하지 않던 친모와의 이별과 경극단에 들게 되었고, 본인의 의지에 관계없이 다른 '성(性)'을 강요당하며 '우희'역을 맡게 되었고, 그가 경극 안에서 열연하며 한없이 쏟아내는 '감정'은 본인 '데이'의 감정인지, '우희'의 감정인지도 알 수 없는 채 '감정'은 극장을 벗어나 그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까지 이어져 서초패왕'항우'를 분한 '샬로(시투)'를 향해 그대로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한 진심일지 연기일지도 모를 항우... 아니, '샬로'를 연모하는 감정에 허우적대며, 위기에 처한 그를 구하고자 원치 않던 일본군 앞에서도 노래하였고...,

그는 매일 '우희'로서 자결했으며, '데이'로써 부활했다가.. 공연이 시작되면 다시 '우희'로서 자결한다.


마치 니체의 '영원 회기'처럼 아니면, 불교의 '윤회'처럼 운명적인 무한한 반복의 고통이다.


- 샬로(시투) / 홍위병, 그리고 범인(凡人)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수동적인 '데이'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급변하는 현실 사회를 조명한다.

1966년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며 수많은 학자들과 예술인들은 과거의 낡은 유물이라는 슬로건 속에 무력에 의하여 짓눌렸고, 구시대의 문화를 행하는 경극배우라는 이유로 데이와 샬로는 사회의 풍파에 몸을 사리며 시대의 뒤틀림 속에 휩쓸린다.


'샬로'의 삶을 용두사미로 비교할 수 있을까?

그 역시 '데이'가 겪은 것처럼, 영화 초반부에는 그가 분한 역할 '패왕 항우'의 영혼이 경극을 넘어온 듯, 현실에서도 패기 넘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는 전근대의 통속적 남성으로서 여색(女色)을 갈구했고, 틈만 나면 오만했다.


하지만 후반부에 갈수록 점점 그의 패기는 관계 속에서 사그라들고, 이내 한낱 필부에 지나지 않는 모습으로 전락한다.

결국 여느 범인(凡人)처럼 사회의 압도적인 권력 앞에 고개를 조아렸고, 두려움 앞에 서서 끝내 자신의 아내 '주샨'마저 배신했다.

그가 홍위병들 앞에서 부르짖던 절규와, 그의 아내 '주샨'에 대한 배신은, 눈앞의 압도적인 권력의 두려움에 복종하고, 권력이 지시하는 폭력에 앞장선 홍위병들 또한 '샬로'와 다르지 않은 사회의 흐름에 휩쓸린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단지 사회를 휘감은 헤게모니 앞에서 호도되었으며, 그저 우매하지만 평범한 신념을 가진 자들이었던 것 뿐이다.


이렇게 영화는 두 주인공을 거울 앞의 대면처럼, '데이'와 '우희', '샬로'와 '홍위병'으로 배치한다.


- 주샨 / 자유의지론자, 그리고 원대인과 보검(寶劍)


운명에 순응적인 '데이'의 안티테제적 인물로서 '주샨'이 등장한다.

그는 데이의 삶과는 배치적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인물로 그려지며..

자신의 의지로 환락가에서 나왔고, 자신의 의지로 '샬로'를 찾아와 혼인을 했고, 최후에는 자신의 의지로 삶을 마감한다.

두 주인공들과 대치되는 또 한 명의 자유의지론자로서 '원대인'이 등장하는데, 그는 재력을 바탕으로 많은 이상을 '현실화' 한다. 경극단이 유지될 수 있도록 금전적인 지원과, '데이'에게 있어서는 '우희'를 현실로 이끌어오는 실현자로서 '장신구'를 선물하거나, 다양한 매너로 '데이' 너머에 있는 '우희'를 대한다.


그의 대단히 개인주의적 성향은 당시의 사회와 대척되는 지점을 보이는데, '데이'로서 대상화되는 '우희'를 향한 마음이기는 하나, 결과적으로는 동성애의 외형적 성향을 반영하게 되었고, 자신의 이익과 직결되지 않다면 언제든 마음을 거둬들이는 강력한 개인주의적 성향은 그 자체가 공산화의 물결이 거칠게 일어난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 극렬히 대치된다.

(한 예로 그는 감옥에 갇힌 '데이'를 구하지 않는데, 이미 그 순간의 '데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방황하며 아편을 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더 이상 원대인에게 '데이'는 '우희'의 대상화가 될 수 없었다.)

또한 그의 분신으로 다뤄지는 장치로써 '보검'이 등장하는데, 이는 마치 매트릭스에서의 '빨간 약' 즉, 현실을 실현하게 할 매개체의 실마리를 갖는다.


보검은 '주샨'과, '원대인'을 대상화 한 거울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 윤회이거나, 아니면 자유의지를 향한 결단이거나


격동의 문화혁명도 세월의 이름으로 지나가고, 두 주인공의 삶 전부였던 경극 역시 과거의 흔적이 되었다.

영화의 처음과 끝은 수미상관적으로 경극의 전통적인 분위기와는 대조적인 현대적 양식으로 축조된 공연장의 무대가 등장한다.

그 가운데 선 '데이'와 '샬로'를 구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을 강렬한 현대의 조명으로써 강렬히 비춘다.

문화혁명 이전,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치열하게 공연하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두 주인공에게 지시하는 스피커의 울림만이 허공을 채우는데, 이는 마치 현대의 비대면적인 감시와 관리 시스템의 변화를 대변하듯 대단히 '판옵티콘적'이며, 관람하는 관객이 누구인지, 몇 명인지도 모른 채 그저 지시에 따라 마지막 연기를 시전한다.


현대식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를 펼친 그들은 그동안 수없이 해왔던 공연이었음에도 낯설고, 세월의 무게에' 샬로'는 숨이 차다.

하지만 '데이'의 분위기는 다소 모호하다. 그는 마치 꿈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과거와 달라진 듯하면서도 같아 보인다.


'데이'의 손에는 '보검'이 들려있다.

그가 연기 중 소품으로 사용했던 '보검'이 아닌, 남편인 '샬로'에게 배신당했던 '주샨'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데이'에게 건네었던 서늘하게 날이 선 보검이다.


'데이'는 이 마지막 공연에서, 극 중 '우희'가 그랬듯 실제로 자신의 목숨을 결정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나는데. '주샨'으로부터 건네받은 '보검'은 아마도 '주샨'이 남긴 메시지로 보여진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해독되지 않는다.

'주샨'은 현실을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이었던 만큼 '데이'에게 '우희'로서의 윤회를 끊거나, 매트릭스의 '빨간약'처럼 '우희'의 꿈으로부터 깨우는 메시지였을까?

아니면 '샬로'에게 배신당한 자신처럼 되지 않도록 '샬로'와의 인연을 끊어내라는 경고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오히려 현실로부터 유리된 삶을 사는 '데이'의 삶이 차라리 옳았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리고 '데이'의 자결은 어떤 결론이었을까? 결국 경극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역사 속 '우희'를 따르는 자결을 택한 것일까?

아니면, 영원히 반복될 윤회를 끊고 '자유의지인'으로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자 했던 첫걸음이었을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