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과 모순으로 점철된 어른의 이야기>
사람들은 그동안 살아온 삶을 기반으로 신념을 가진다.
따라서 신념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고, 대체로 누가 옳거나 틀림없이, 그저 서로가 다를 뿐이다.
‘기상청 사람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갈등의 장치적인 특수한 인물을 제외하고, 모두들 평범하고 선량하다.
하지만 이런 온당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항상 갈등은 발생된다.
어른의 이야기가 어려운 이유는, 아무 문제없이 온당하고 선량한 인물들 사이에서도 갈등이라는 모순이 발생되기 때문이며, 모순은 결국 누구의 잘못인지 함부로 규정할 수 없는 무기력한 비극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곧 다가 올 기상에 대한 예측을 위해 매일 토론을 벌이며, 직책에 따라 각자의 경험에서 기반된 판단과 증거들로 기상을 바라보며 나름의 예측 값을 제시하지만, 들어보면 누구 하나 타당하지 않은 의견은 없다. 그저 다가오는 날씨만이 하나의 정답을 가진 채 시간의 이름으로 증명될 뿐이다.
결과적으로 누군가의 의견이 맞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하나의 답을 찾기 위해서 모두가 노력했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내일을 채운다.
인물들 개별의 삶도 기상예측과 마찬가지다. 각자 자신의 삶의 반영에서 발생된 신념을 기반으로 타인을 측정하고 예측하지만, 서로 다른 신념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계산될 수 없는 모순에 잠시 멈춰 서거나, 선회하며 다른 경로를 찾아나간다.
다만 날씨와 인간이 다른 점은..,
날씨 예측은 단 하나의 답으로써 완결성의 진리를 가지지만, 개별적 진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규정될 수 없다.
설령 누구나 풀어낼 ‘1+1’의 물음에 대해서도, 한 사람은 ‘2’라고 대답하고, 다른 누군가는 ‘1’이라는 오답을 냈어도 그가 틀렸다고 공히 단정 할 수는 없다. 그의 삶은 여전히 변증적으로 실천 중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같은 건물 속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한 명씩 찬찬히 비춘다.
그들은 각자 한 어른으로서 살아간다. 어른의 삶이라는 것...
어쩌면 그것은 매일 변화무쌍한 날씨를 예측하는 것처럼, 벗어날 수 없는 주체와 객체, 즉 폐쇄적인 자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가능한 타인을 이해해보려 애쓰고, 헤겔의 철학처럼 변증적인 탐구를 통하여 상대와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며, 모두가 참이거나 거짓일 수도 있다는 모순을 딛고 다음으로 나아 갈 정반합의 체계를 가진 삶을 추구하는 것
이런 게 어른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가볍지만 섬세하게 잘 다뤘고, 보는 내내 많은 공감과 여러 생각들을 해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