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있거나 없다.]
정말로 진실은 존재 가능할까
시간이라는 맥락 속에서 모든 진실들은 발생한 순간부터 기억으로부터 각색되고 욕망에 덧칠된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처럼 불안정한 진실을 붙잡아두기 위해 끊임없이 사진을 찍지만, 애석하게도 기억은 또다시 사진으로부터 왜곡된다.
그날의 콘트라스트, 그날의 기분은 한 장의 사진 속에 예속되며, 훗날 다시 그 사진을 보았을 땐, 사진으로부터 버려진 기억들이 프레임 밖을 떠돌며 진실이 왜곡되는 것이다.
이처럼 진실은 시간이라는 압력에 의해 필연적으로 그 형상이 고정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리며 오늘로부터 멀어져 간다. 또한 진실은 각자 바라보는 시차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과연 우리는 진실이라 규정할 수 있는가.
예상컨대 진실의 속성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변치 않고 고정되어 있는 그 무엇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진실의 존재하는 형식 그 자체가 흐려지고 흔들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진실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로 현실에서 우리가 진실로 여기는 것들은 일종의 '믿음'일 가능성이 크고,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판단을 할수록 그것이 믿을만한 진실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 게다.
즉 진실은 믿음을 기반하며, 따라서 언제나 있거나 없다.
“믿음은 어디에서부터 발생되고,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일상에서 흔히 타인을 믿는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믿는다는 건 무엇이고, 어떠한 순간에 믿음이 발생할까?
특정 타인이나 가족을 믿는다며 가볍게 말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이 자신이 믿는 것과 다르게 보임에도 자신이 처음 믿고자 했던 것을 여전히 믿는 것이 아닐까?
만약 눈 앞의 장면만을 보고 판단하여 믿음을 저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망막에 입력된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한 것일 게다.
(예컨대 "당신이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라고 하는 건, 사실 그 사람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눈앞의 장면, 즉 사실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는 것일 듯 싶다. 정말로 믿는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널 믿어"라고 하는 상황일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내가 믿지 않을 순간'에 비로소 발생하며, 그럼에도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을 행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영화를 시청했을 때 ‘유레루’는 고정되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흔들리는 ‘진실이라는 허구’, 그리고 ‘믿음’으로부터 구축되는 진실 혹은 사실에 대하여 진술하는 영화가 아닐까.
영화 ‘유레루 (揺れる, 흔들리다)'는 제목처럼 온전히 고정되지 못한 채 흔들리는 것에 대한 관념을 인물로써 체현한다.
그들 모두의 삶은 어딘가에 단단히 고정되지 못한 채, 굴곡진 나선을 그리며 방황하지만, 서로를 동경하면서도 오직 자신만이 갈피없이 흔들린 줄 알았던 진자운동은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서 더욱 큰 파장으로 번져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다.
떠나간 자, 타케루 (오다기리 죠 분)
주인공 ‘타케루’는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사진가로 살아가지만, 그의 현실은 시골에 살았던 자신의 기억들과 단절한 채 살아간다.
어머니의 장례로 인해 긴 시간의 간극 끝에 고향집에 돌아왔지만, 변변한 사진이 없어 합성으로 급조한 어머니의 영정사진처럼 타케루 역시 장례를 치르던 혈족들과 분리된 파편처럼 어긋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타케루는 온전히 안착되지 못한 채 당일 바로 도쿄로 되돌아갈지 아니면 형의 제안대로 하루 더 남아있을지, 그리고 형이 운영하는 주유소에서 일하는 옛 인연 치에코와 형의 관계를 질투하는지 아니면 몰래 치에코와 잠자리를 가진 것에 형에게 미안해하는지.. 등
감정을 규정짓지 못하고 머뭇거린 채 다음 날 사건을 맞이한다.
번민하는 자, 미노루 (카가와 데루유키 분)
타케루의 형, 언제나 삶에 순종하는 미노루는 가업으로 이어받은 주유소를 성실히 운영하며 불친절한 고객에게도 친절히 응대하고, 동시에 집안일을 도맡아 부모님을 모시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희망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한심한 자신의 처지와, 가족들을 외면하고 스스로의 삶을 찾아 떠난 동생(타케루)을 부러워하면서도 시기한다.
그런 자신을 모습을 혐오하던 그에게 마지막으로 소중하게 여겼던 치에코에 대한 감정마저 부정당하는 순간, 오랜 시간 억눌렸던 감정들이 폭발되며 사건을 일으킨다.
끝내 이소하지 못한 자, 치에코 (마키 요코 분)
미노루가 도맡아 운영하는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살아가는 치에코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어머니가 중학생 딸이 있는 남성과 재혼하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분가를 하게 되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성인으로서의 완전한 이소가 아닌 표면적 이소로서 여전히 같은 지역, 같은 사람들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그런 치에코에게 타케루는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한 이소를 이뤄낸 동경적 인물로 여겨졌을 것이다.
(타케루가 치에코의 집에 갔을 때, 선반 위에 자신이 출간한 사진집들이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며 치에코의 감정을 인지했을 것이고, 타케루에게 있어 그러한 사실은 형에게 배신을 저지른 듯한 기분과 고향집을 돌보지 않은 죄책감이 뒤섞여 고향과 관련된 그 무엇도 자신의 삶에 들이고 싶지 않은 거부감에 서둘러 치에코의 집을 떠나왔을 것이다.)
다음 날, 흔들리는 다리 건너편에 있는 타케루를 바라보며 치에코는 완전한 이소를 위해서는 반드시 다리를 건너 타케루에게 가는 것이 목표였고, 그런 치에코를 위험하다며 붙잡은 미노루를 자신을 통제하는 직장 상사이자, 동시에 자신의 이소를 가로막는 고향사람으로서 뿌리치며 극복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단단히 붙잡은 미노루를 밀어내는 과정에서 사건이 일어났고, 치에코는 다리 밑으로 추락해 곧 주검으로 발견된다.
영화는 사건의 발단 지점인 다리 위의 상황, 즉 치에코가 다리 밑으로 추락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치에코의 죽음은 떠나간 자(타케루)는 멀리서 관망하였고, 번민하는 자(미노루)는 현장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행위했으며, 이소하지 못한 자(치에코)는 거기서 끝이 났다.
하지만 삶은 여전히 맥락처럼 이어져 간다. 사회적 합의로서 치에코의 죽음은 사회에 공표되어야 했고, 사회 속에서 ‘사실(진실)’은 어느 한 가지로 규정되어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재판은 시작된다.
유일한 목격자인 타케루는 사건 현장을 목격한 건 맞지만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소리까지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형의 무죄를 주장하는 이유는 과연 정말로 형의 행동을 무죄로 인식했기 때문이었을까?
사회로부터 우리는 많은 관념들을 강요당한다.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많은 결정에 있어 그것이 과연 현명한 결정이었을지에 대한 판단적 근거는 대부분 사회가 요구하는 관념으로부터 독립된 완전한 진리에서 이끌어 낸 결정이 아닌, 사회가 지배하는 관념을 넘어서기 어렵다.
때문에 타케루가 형의 무죄를 주장하는 건, 그의 선택이 진리로서 옳았기 때문이라기보다 가족을 보호하려는 사회적 통념 속에서 결정되었을 확률이 크다.
우리는 끝내 타인이 될 수 없다. 아무리 타케루의 눈 앞에서 형이 살인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타케루만의 시각에서 바라본 개인적 판단에 불과할 것이므로, 끝내 타케루는 형의 진심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이후 벌어지는 재판 역시 실제 사건이 벌어진 장면과는 관계없이 인물들의 ‘그럴듯한 설명’에 의지한 채 흘러간다.
마치 칸트가 제안한 ‘물자체’의 세계, 즉 개인의 인식 너머에 ‘물자체’의 세계가 존재할지언정, 결코 진실에 가닿을 수는 없다.
따라서 대체로 사람들이 진실이라 규정하며 믿을 수 있는 것들은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그것을 얼마나 신뢰하는가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외부세계의 판단, 즉 타케루가 형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근거로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는 것. 바로 ‘맥락’이 있다.
어떻게 보면 타케루에게 있어 사건 당일 자신이 직접 '목격한 사실'은 형의 유무죄의 판단에 있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내가 알던 형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맥락 상의 판단으로 사실관계를 정의할 뿐이다.
또한 미노루 역시 처음에는 경찰에게 직접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수했지만, 반대로 법정에서는 무죄를 주장한다. 미노루에게는 밖에서 희망 없이 살아가는 일상과 터전이 감옥일지, 어쩌면 그것과 구분되지 않는 감옥이 자신의 집인지 애써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가 살아왔던 맥락의 해석에 따라 진실의 가치는 힘없이 흔들린다.
영화의 말미에 타케루는 최초의 주장과는 달리, 최후증언에서 형의 유죄를 주장하게 된다.
영화 내내 형이 보여준 이상 행동들이 누적되면서 타케루는 점점 형에 대한 맥락적 해석까지 바꾸게 된 것이다.
결국 그로 인해 미노루는 유죄로 판결되고, 7년이 흘러 비로소 그가 출소하는 날이 가까워졌다.
출소하는 형 앞에 나설 자신이 없어 망설이던 타케루는 우연히 사건이 일어났던 계곡에서 어릴 적 가족끼리 찍은 영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 영상에는 어린 타케루가 고소공포증이 있는 형의 손을 잡고 다리를 건너거나, 키가 작아 바위를 오르지 못하는 타케루를 위해 미노루가 손을 내밀어 끌어올려주는 장면들이 펼쳐진다.
기록된 영상은 하나의 사실을 판단하는데 일편 도움을 줄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역시 흔들리는 진실을 온전히 말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단편적인 영상은 고작 미노루라는 인간에 대한 맥락을 조금 더 파악해 줄 수 있는 단서에 불과하므로, 단지 그것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번 진실을 판단해 볼 계기가 되어줄 정도일 것이다.
결국 출소 후 혼자 반대편 인도를 걷고 있는 형의 모습을 발견한 타케루는 형을 울부짖으며 따라가지만, 미노루는 그 소리에 돌아보지 않는다. 타케루가 형을 부르는 간절한 마음과는 다르게, 형은 그저 우연히 고개를 돌려 동생을 발견하고는 미소 지을 뿐, 우리의 감정과 실제 현실은 그토록 괴리가 있다.
다만 그 순간의 애틋하고 격한 감정에 진실이라는 허구는 그저 또 한 번 흔들렸을 뿐이다.
늘 있던 일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