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으로 규정되어 버린 한 인간의 시점>
고백하자면 남성을 배정받았다는 이유로 홀로 걷는 밤거리를 제약없이 즐겼거나,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상황에서 나의 누이보다 나은 대접을 받곤 했다. 거듭 고백하면 나는 누이보다 좋은 사람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더 나은 취급을 받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특권을 이해하면서도 원래부터 내 것인 양 체화했다.
그런 습성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지금도 마치 특권의 좀비가 된 채 기울어진 세상을 배회하지만, 나의 성에 낀 유리창으로나마 그 너머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듯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을 택한 이유는 제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제목을 접한 순간 “아~”하며 탄식이 새어 나왔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문자에서 알 수 있듯 교차라는 단어는 둘 이상의 다수성/복수성을 가진다.
즉 우리가 흔히 페미니즘을 명칭으로서의 언어로 규정하며 단지 일면성의 담론을 가진 다수 여성집단으로서 취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수많은 담론이 분류되고 첨예한 주장들이 오가는 방대하고 거대한 삶의 나열들인 것이다.
역사의 관류 속에서 여성의 주체성과 권리를 외치는 페미니즘은 공히 인류 절반의 이야기라 할 수 있고, 동종의 인류로서 내가 이 이야기들을 몰라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필연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어떻게 해서든 삶으로부터 마주해야 하고, 끝내 알아져야 할 그 무엇으로서 나는 인식하고 있다.
사실 고작 한 권 읽은 책의 내용을 애써 말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밖으로 꺼내지면 추해지는 내장처럼, 글을 써 내려갈수록 스스로의 무지함만 홍보하는 꼴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연히 남성으로 분류된 한 인류로서 페미니즘에 대해 아는 말을 찾기보다는 모르는 말을 찾기 위해 글을 써본다.
1.
한 뉴스 기사를 보며 아내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대략 기억하는 기사의 내용은 한 여성 연예인이 ‘남성 스트립쇼’를 기획했다는 내용이었는데, 기사를 읽은 후 아내에게 물었다.
“여성들은 남성에게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자신들은 이런 기획을 버젓이 하는 거지?”
그리 오래전 이야기도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저런 바보 같은 질문은 왜 했었나 싶다.
행위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당시 나는 ‘페미니즘’ 그 자체를 단지 하나의 담론으로 규정했다. 가령 정치적 진보와 보수, 국가적으로 자민족과 타민족을 구별하려는 것처럼, 한 명의 존재에게 큰 담론을 입혀 규정하려는 습성부터 튀어나온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존재를 가장 손쉽게 규정지을 수는 있겠으나, 가학성을 가진다는 사실도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수많은 존재를 규정하는 근거에 있어 가시적인 물성을 제외한 모든 것이 비가시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살아있는 존재가 가지는 물성이란, 한시적으로만 형태를 유지하는 불안정한 한계성을 가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규정하며 살지 않을 수 없다. 규정으로부터 의미가 발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의미로서 현명한 규정을 하기 위해서는 물성 너머의 비가시적 영역까지 신중히 고려해야 하고, 규정된 남성으로서 일종의 페미니즘이라는 검은대륙 너머를 최대한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라도 담론적인 규정을 제한하고, 가능한 남성으로서가 아닌 개별적이며 성별적 구분없이 범인류적인 사고를 해야 간신히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
2.
문득 각종 매체들에서 말해지거나, 때로는 개그소재로서의 ‘여성의 심리와 언어는 복잡하다는 것’은 어쩌면 남성 담론적 세상에서 전해지는 허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역사 연구자도 아닌 나로서도 각종 역사적 사례들을 접하다 보면 그것이 꼭 여성과 관련된 주제가 아니더라도 심심치 않게 여성의 억압에 관한 사례들을 접하기 때문인데, 그런 점에서 아마도 여성은 과거에서부터 제대로 해석하거나, 해석될 필요성을 갖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소유되었으며, 남성의 지식으로부터 추정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은 ‘모순 투성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거나, 억눌린 욕망으로부터 히스테리적 광기를 머금거나 종잡을 수 없는 심리를 애써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3.
나의 타임라인에서 ‘2016년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이후 여성에 관한 많은 지형적 변화를 느끼게 되었다. 그때 ‘미러링’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었다.
내가 이해하는 범위에서 미러링이란 거울로 간주할만한 하나의 대상을 설정하고, 그 대상의 행동을 모방함으로써 대상에 가진 진실을 더욱 명확하게 규정하기 위한 오랜 수단 중 하나다.
따라서 미러링이라는 것은 비단 진보적 성향의 여성들이 남성성에 대한 저항의 방법으로서 선택한 행위만이 아닌, 성별에 관계없이 많은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던 수단이기도 하다.
미러링이란 그만큼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반작용 또한 상당히 거칠게 드러나지 않나 싶다.
많은 남성이 여성들이 행한 미러링에 불쾌함을 느끼는 건, 그간 보기 힘들었던 생소한 장면의 연출, 마치 드라마 속 라이벌의 등장처럼 동일한 지위성을 가진 존재의 등장에 대한 진화적 위협감, 어쩌면 남성들 스스로 그동안의 자신들 행해왔던 행동을 이성이 모방하는 것을 목도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일종의 ‘불쾌함의 골짜기’와도 비슷한 감정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남성인 나로서도 처음 그것을 접했을 때 당황스럽기도 했고, 일종의 공격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사건 이후로 미러링을 비롯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사회에 퍼져나가며 방송을 포함한 사회의 많은 부분이 조금씩이나마 변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인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남성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변화는 불편함을 동반하고, 필요하다면 불편해야 한다.
4.
20대에는 별 관심도 없었던 걸그룹이, 오히려 요즘 들어 관심이 간다. 한마디로 전에 없던 ‘멋짐’이 있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래서 과거의 걸그룹과 지금의 걸그룹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마도 가장 큰 변화 중 한 가지가 과거 타자화 된 섹슈얼리티에서 주체화된 섹슈얼리티로 변화된 게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기꺼이(소속사에서 시켰겠지만) 남성 팬들의 대상화되기 쉽도록 스타일링을 정하고, 최대한 타자화 되기 위해서 노력한 듯 보였지만, 요즘에는 주체화된 섹슈얼리티로서 설령 노출을 하더라도 본인에게 가장 매력적인 방식으로 노출하거나, 이성적 팬심의 범주에서 벗어나 동성의 팬에게도 포커스가 맞춰진 변화가 주요한 점이 아닐까 싶다.
많은 부분 주체성을 타자로부터 되찾아옴으로써 그룹 내 개인의 개성 역시 더욱 다양해졌다. 과거에는 가장 인기 있는 한 멤버가 하드캐리 했던 양상과는 달리,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매체들에 힘입어 각 멤버별로 채널이 파편화되고 그렇게 구축된 개성을 가진 멤버들끼리 재조합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볼거리가 파생되는 것 같다. (순전히 나만의 해석이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여성에 관한 많은 부분을 놓치고 왔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회한이 들게 될 일이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존재라고 주장하며 인류로서 자부심도 느끼는 수많은 업적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인류의 반을 놓친 것만 같은 역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것도 남성의 시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점에서 남성의 삶 속에 페미니즘란, 언젠가는 반드시 교차해야 할 그 무엇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