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
한 위정자로부터 구역질처럼 쏟아지는 어떤 자유가 일상에 범람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 자유라는 물살에 세상의 모든 것들이 수장돼버릴 것만 같은.. 지금은 그야말로 자유(?)의 시대다.
하지만 그가 주창하는 자유라는 것이 뉴스와 세상을 가득 메워도,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여러 번 생각해도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그 이유는 언어학자 소쉬르의 기표와 기의적 관점에서 위정자의 자유와 나의 자유는 이질동상에 가깝고, 게다가 예상컨대 그는 약탈적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결과적으로는 위정자와 나는 동일한 발음과 표기로서의 ‘자유’를 공유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단어가 오염되었다는 느낌을 받음과 동시에 점점 ‘자유’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회의감 마저 들기 시작해서 그것을 조금이나마 상쇄하고, 단어의 개념을 환기시켜 줄 책으로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집어들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맥락 속에서 태어난다. 물론 개별적 존재자의 관점에서는 태어난 그 순간이 바로 우주의 시작이라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이 그러하다. 따라서 무인도에서 저절로 발생했거나, 어떤 행성의 유일한 지적존재가 아닌 이상,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세상이라는 맥락에 짓눌리고, 이데올로기라는 포승에 구속된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유’는 과연 존재 가능하며, 만약 존재한다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걸까?
우선 자유라는 단어의 일상적 쓰임은 주로 ’구속받지 않고 행위할’ 자유로서 사용되기도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은 태생적으로 맥락과 이념에 속박되어 존재하므로 자유에는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의 발현으로서 ‘구속에서 벗어난’ 상태를 규정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자유에 대한 정의는 모두 시스템 속에서 규정된 정의다. 시스템 속에서 자유는 구속의 배타적 성격을 띠게 될 수밖에 없는데, 과연 그것을 완전한 자유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시스템 속에서는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구속’의 개념을 끌어와야 하는데, 나로서는 그것이 곧 자유는 구속과 불가결한 개념으로서 인식되기 때문에 모순적으로 자유 그 자체가 구조(시스템) 속에 종속되어 있는 형국으로 인식된다.
또한 구속은 하나의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안정함을 뜻하기도 한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이나 돌아갈 곳을 아는 것에 대한 구속은 어느정도 두려움을 예측, 관리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구조속에서 자유는 적절한 구속이 혼합된 ‘자율’로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다른 자유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라는 생각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 그것에 대한 대답을 ‘그리스인 조르바’가 어느정도 해주고 있었다.
<근원적 자유>
종교는 언제나 자유를 말한다. 언뜻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가?
대표적으로 기독교와 불교만 보더라도 지옥의 형벌로부터 벗어날 자유, 속세의 번뇌로부터 벗어날 자유에 대하여 설파하며 전도한다.
하지만 엄격한 교리에 맞게 살면서 결국 창조주의 땅에 입성하여도 여전히 창조주와 일종의 계약관계의 범위 속에서 자유를 갖는다. 또한 속세의 모든 번뇌를 버리고 열반에 들어도 본질적으로 살아가는 동안 속세와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가에 대한 결괏값이므로, 결국 열반도 구조 속의 자유라는 점에서는 벗어나긴 어렵다.
하지만 조르바가 희구하는 자유는 결이 조금 다르다.
그 역시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만은 변함없지만, 그는 자유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조르바에게 있어 자유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먹물들이 만들어 낸 개념, 이데올로기 속에서 탄생한 단어/개념이기 때문에 자유를 생각하는 그 순간 구조속에 속박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말로써 뜻이 전달되지 않을 것 같으면 춤을 추거나, 산투르를 연주한다. 또한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이성을 가진 남성으로서가 아닌 하나의 야생종으로서 본능에 가깝게 대하며(이것은 분명 지금의 관점에서 온전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러면서도 눈앞의 그 여성이 핍박받거나, 죽음의 기로 앞에 설 때 동종으로서 같이 슬퍼하기도 한다.
즉 그는 인간의 계량종으로 태어났지만 본래의 야생종으로 회귀하며 모든 지적 개념조차 없던 근원으로 돌아가는 자유로 향한다.
물론 우리같은 이성을 가진 이성체로서 그를 바라보면 과격해 보이거나, 때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낯부끄러운 행위를 서슴없이 하는 자로 인식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이후로 인간은 더 이상 신의 힘을 빌지 않아도 많은 근원적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근원을 모른다는 것은 곧 두려움 위에 서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신을 빌어 창조된 시점을 알아내려 한 것도, 스스로 진정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었는가에 대한 두려운 물음으로부터 안전한 대답을 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또한 운좋게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답을 들었더라도, 그 다음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는 곧 범위를 규정짓는 ‘구속’을 의미한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어떠한 사물이나 행동을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규정하는 순간부터 구속은 시작되기 때문에 신이라는 이성의 근원적 존재는 태생적으로 구조적 자유 이외엔 다른 자유는 말해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조르바가 희구하는 자유는 그러한 이성적 자유가 아닌 모든 이성이 싹트기 전 종의 기원에 가까운 인간으로서만 가질 수 있는 무지한 근원적 자유를 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