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과 비규정의 경계에 서서>
한 사람을, 타인과 완전히 구분되는 존재라는 이유로 하나의 개별적 종족으로 규정했을 때, 자신을 지나쳐간 무수한 날들 동안 얼마큼의 종족이 나로부터 구별되고 규정되었을까?
구별과 규정이라는 것은 나로부터 세상을 분리하는 작업이며, 그렇게 규정된 모든 대상들을 일련의 경향성을 가진 나의 인격(이성)으로 일이관지 함으로써 하나의 세계관이 개인에게 구축되는 것일 게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육신이라는 닫힌 시야 속에서 타종족과 동족을 구별하고, 그러한 행위가 한 존재가 바라보는 거시적 세계와 생존성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탐구하는 영화라 말해본다.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부표
한 개인은 모든 개인과 같지 않다. 가족, 친구, 연인, 회사 그 어떤 관계에 속해 보아도 나는 내가 아닌 채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나와 타인이라는 존재가 구별되는 간극에서부터 고독과 외로움은 발생한다.
고독과 외로움은 내가 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극사실적 감정이기 때문에 충분히 압도적이며, 이 감정의 압제로부터 어떻게든 놓여나기 위해 우리는 타인을 모방하거나, 희미한 유사성(동족성)이라도 찾아 공동체를 이룬다.
하지만 슬프게도 자신과 비슷한 동족을 찾아도, 심지어 자신과 같은 DNA로 만들어진 복제인간을 곁에 두어도.. 그와 내가 동일한 육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또다시 외로움은 순환반복될 것이며, 끝내 우리는 이 육신의 제약적 형태로 살아가는 한, 외로움의 예속적 삶으로부터 벗어나긴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독과 외로움을 부정하기 보다는 가능한 해석/탐구해 보려 노력해야 하며, 그렇게 해석/탐구된 고독과 외로움은 자아 발현의 근원적 에너지로 간주해보거나, 매 순간 타인과 사회 속에 매몰되는 자신을 잃지 않도록 내면에 띄울 부표로 삼아야 되지 않을까.
영화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라면.. 어딜 가도 고독을 꽉 붙잡을 수 있을 거야.
부디 모두들 고독과 외로움을 놓치지 않기를...
파편으로부터 규정되는 세계관
파편화 1 (파편화 된 사건의 나열)
영화는 시작 후에도 한참 동안 사건들이 파편화 되어 그려진다. 하지만 그래서 현실적이다.
대체로 사람들의 일상은 시시각각 변하는 공간에 따라 그리고 대면하는 사람이 바뀜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는것 그 뿐이라서, 조금 전 회사에서 힘들고 우울했던 나는, 집에 도착하고 나니 편안하거나, 저녁을 먹고나니 졸리거나...
가족과 연인, 친구 등과 다투고 뛰쳐나가도 또다른 타인을 만나게 되면 감정은 다시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아무 일도 아니며, 그저 우리의 일상이 파편적 사건들의 시간 순의 나열일 뿐. 영화는 그러한 파편화된 일상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파편화 2 (파편화 된 감정의 우선성)
감정 역시 일상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파편화되어 있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감정을 하나로 구분 짓는 경향이 있다. (나만 그런지도?)
그런데 현실에서 자세히 관찰해보면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도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발생한다.
예컨대 연인에 대한 감정을 가정했을 때, 관성적으로 연인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 한 가지로 규정지으려 하지만 실제로는 연인에게 사랑, 미움, 실망, 아쉬움...등 여러 감정들을 이미 부여한 상태에서 상황에 따라 순간적으로 부각되는 감정들을 대표적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사랑하지만 답답한 감정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안타까운 감정일 수도 있고, 화가 나지만 밉지는 않은 복합적 감정일 수도 있다.
이렇게 하나의 대상에 부여되었던 여러가지 감정들을 총 합산했을 때, 평균적인 값을 가지는 경향성에 따라 대상에 대한 나의 감정이 전체적으로는 사랑일지, 증오일지, 무관심일 지를 규정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감정은 일상에서 매 순간 파편화 되어 있으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일상이라는 것은 늘 있는 일들의 연속이지만 언제나 입체적일 준비가 되어있는 것'일 게다.
이 모든 일상 속에 사건들의 파편, 감정들의 파편은 뒤엉켜 있지만, 우리는 이러한 개별적 파편들을 하나의 시야로 판별/판독함으로써 다양한 사건과 감정에 대해서 언제나 비슷한 양식으로 결정하거나 대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추론해본다.
따라서 한 사람의 '인격'이라는 함은 모든 사건/ 감정들을 일괄적으로 대하는 경향성, 그것이 곧 세계관이 구축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치히로 상'은 그렇게 구축된 세계관이라는 것을 상당히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세계관
조금 폭력적일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도, 그리고 나의 일상에서도 자주 겪으며 느끼는 것들 중 사람들로부터 볼 수 있는 전반적인 성향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보면..
- 사회적 담론을 인정하는 성향 (보수)
- 사회적 담론에 물음을 던지는 성향 (진보)
이렇게 나눠진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을 스쳐가는 많은 사람들은 첫 번째 '사회의 담론을 인정하는 성향'의 사람들로 포진되어 있다. 그들은 주인공 '치히로'의 전직(마사지 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치히로에 대한 선입견을 가진다. 또한 그들은 배우자와 성별에 따른 역할 구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수적 성향(세계관)을 가진다.
반면 치히로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인물들은 구축된 담론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치히로의 전직에 대한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고 그저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받아들이며, 노숙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으며 나이나 성별에 따른 서열관계 역시 희미하다.
때문에 주인공 치히로 상을 비롯한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개별적 세계관의 충돌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알아보며 안심하고,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을 골자로 그려가고 있고, 그 사회적 공동체의 구성에는 비혈연적인 인물들이 만나 제2의 가족을 구성하는 것을 넘어, 기존의 혈연적 가족마저 뛰어넘는 결속력도 가능함을 암시한다. (혈연적 가족이라는 것도 분리된 존재성 앞에서는 결국 하나의 굴레가 될 수 있음을...)
규정의 경계에 서서..
실로 우리는 살아가며 타인에 대해 많은 것들을 규정한다.
직업, 성별, 나이, 부의 축적 정도, 이름... 그 모든 규정이 불필요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규정은 일정 부분 폭력성을 담지하고 있음은 인지해야 한다.
타인의 직업을 규정하는 순간 연쇄적으로 부의 축적을 가늠하거나, 나이가 많고 적음을 규정하여 경계를 치거나, 영화에서처럼 '마사지 걸'이라는 전직이 공개되고 나서 직업적 규정에 귀속된 많은 남성들이 여성성이 주는 즐거움을 받기 위해 기꺼이 줄을 서거나, 또한 전직 마사지 걸 출신이라며 비하한다거나.
영화는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규정들 그 자체에 대한 반문을 던진고 있으며, 나아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속박처럼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이름'이라는 것 마저도 하나의 규정에 지나지 않음을 영화의 제목으로 내세움으로써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치히로'와 '아야' 사이)
물론 현실적으로 규정을 하지 않는 사회를 가정해보면, 일상과 사회 시스템 곳곳의 체계가 무너져 내리며 상상 이상의 문제들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조그만 영화를 통해서라도 규정에 대한 해체와 동시에 규정과 비규정 그 사이의 경계에 서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내일부터 일 시작해
- 근데.. 아무것도 안 물어보세요?
뭘?
- 뭐... 여기에(마사지 업소) 왜 왔는지라든가. 뭐 하고 살았는지라든가...
그럴 필요 없어. 난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얘기하는 거니까.
예명은 뭘로 할래?
- 뭐가 좋을까요?
에이... 네 이름인데 네가 정해야지
- 그럼... 치히로로 할게요
그럼 오늘부터 넌 치히로야.. 치히로 씨,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