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이방인’을 읽으며...]
‘나'의 규정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언제부터 ‘나’였을까?]
나의 육신과 의식이 지금 여기 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알겠는데.. 이 존재성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지?
나는 나의 생일을 안다. 하지만 단지 그것은 하나의 ‘정보’로서.., 그러니까 내가 경험적으로 체득한 정보가 아닌, 부모가 나에게 말해주거나 호적 상에 적혀있는 획득 정보이지, 내가 체험한 정보의 느낌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마치 꿈을 꿀 때처럼, 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듯이.. 이 육신과 의식은 그렇게 시작되어 있다.
살아가며 접하는 수많은 지식과 정보들로부터 얻어낸 사실 중 한 가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나의 부모의 부모가 태어나기 전부터 세상은 존재해왔다는 것인데, 과연 장엄하다고도 할 수 있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껏 찰나 동안 명멸하는 것이 한 인간의 삶이라면, 그런 거대한 세상 앞에 '나'라는 존재는 과연 온전히 내가 맞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존재감을 부여받은 걸까? 아니면 나는, 나라고도 할 수도 없는 하찮고 사소한 그저 세상의 미물인가?
눈만 뜨면 보이는 세상은 당연한 듯 매일 거기 놓여있지만, 사실 그것들은 전부 세상이 지나온 총체적 시간의 결괏값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라 말해지는 게 아닌,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어느 한편에는, 타인이 배제된 나만의 온전한 세상이 실재하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을 지울 수 없기에..., 그래서 하염없이 세상과 나를 구분하고 분리하려 드는 경위가 되는 것일 게다.
이런 생각들의 흐름으로부터 [나는 언제부터 ‘나’였을까?]라는 물음이 발생하게 되고, 물음의 발원지를 찾아서 자신의 타임라인을 따라 기억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마치 바지랑대처럼 몇 군데 의미 있는 지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지점들은 어린 시절 전능한 줄로만 알았던 부모의 시야와 사용하는 언어의 불완전성, 그리고 그들이 내게 물려준 도덕관에서 균열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들이거나..,
타인들과 맺는 모든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존재의 비동질성으로부터였거나…
그 외에도 살아가며 크고 작은 수많은 사건들을 목도하고 체험하는 과정들이 누적되고, 그것이 다시 나의 관점과 언어로서 번역되어 재배치되고 나서야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이 자리에 놓여 있었고, 그렇게 홀로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완전한 ‘나’ 임을 간신히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러한 과정은 비단, ‘나’라는 존재성을 주지의 사실로서 치부하고 말 것이 아닌, 타 존재와 구별되는 ‘차이’로부터 자신의 근원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차이’의 발생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복수성/다원성(human plurality)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행위와 말, 이 두 가지의 기본 조건이 되는 인간의 복수성은 평등과 차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인간들이 평등하지 않다면 그들은 서로, 그리고 자신들에 앞서왔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고, 또 미래를 계획하고 자신들 다음에 올 사람들의 필요를 예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인간들이 다르지 않다면 현재 존재하고 과거에 존재했고 앞으로 존재할 사람들과 구별되는 각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말을 하거나 행위를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자신을 규정하는 행위는 동시에 ‘차이’와 ‘경계’를 발생시킨다. ‘나’라는 범위가 규정되고 거기에 제한된 육신과 의식, 이 출발점에서부터 세상은 번역되기에.. 세상이 언제나 그 자리에 놓여 있음에도, 나의 망막에 맺힌 세상과 그리고 망막 밖의 세상은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내가 아내를 바라보며 규정하는 나의 관념 속 아내와, 실체적 당사자가 규정하는 아내(자신)는 결코 같을 수 없는 것처럼, 동일한 대상에게 마저도 관념과 사실 사이의 비대칭적 구조, 즉 ‘차이’로부터 소통이 요구되며, 차이가 없다면 소통의 발생근거는 소거될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서부터 말해지는 것들 관하여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는 편인데, 최근에 이와 관련 있어 보이는 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그리고 스탕달의 [적과 흑]이 그것인데,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내가 바로 나’라는 인식이 시나브로 무뎌져 갈 때, 이 두 편의 소설로부터 다시 탄력을 받아 실존적인 물음과 고민을 이어가게 되었던 것 같다.
두 소설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간추려 보면 이렇다.
두 소설 속 주인공 쥘리앵(적과 흑), 뫼르소(이방인)는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서 살아갔지만, 두 인물은 세상과의 차이로 인하여 발생된 죽음을 기꺼이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렇게 읽히더라고..)
적과 흑의 쥘리앵의 경우, 1830년대 프랑스 왕정복고 시대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란 인물로서, 비록 출신은 비천하지만 드높은 자존심과 이상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자신이 가졌던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각 계층의 인간마다 가지는 '타락한 욕망'들을 목도하게 되는데, 비록 그 스스로도 신분상승 꿈꾸며 상류사회로 편입되기 위해서 살아갔지만, 자신의 담대한 목표였던 상류사회에서 거주하는 인간들마저 허황된 욕망과 위선으로 구축되고 실천되는 사회였음을 깨닫게 되고 그는 실망한다.
신분상승을 위한 그의 긴 여정 중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여성이었던 레날 부인의 거짓 증언이 담긴 편지로 인하여, 그는 온갖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자신이 바라던 출세의 정점에 오른 자리를 박탈하게 되었다.
이후 분노의 화신이 된 쥘리앵이 레날 부인을 저격하기 위해 다시 과거의 교회로 찾아가게 된 이유에는 단지 출세의 좌절에서 온 분노가 아닌, 자신을 파렴치하게 묘사한 편지글에 대한 모욕을 참을 수 없어서였다.
교회에 잠입하여 끝내 레날 부인에게 방아쇠를 당긴 죄로 인하여 그는 감옥에 수감되고, 감옥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을 사로잡은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쥘리앵은 최후진술 이후 사형을 선고받게 되는데, 최후진술을 하는 과정에서 쥘리앵은 스스로에게 불리한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계급'에 관한 문제를 언급한다. 그가 바라본 법정에서의 재판과 절차는 결국, 자신의 죄를 심사하고 선고를 내리는 계급이,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욕망과 위선으로 점철된 기득권, 즉 상류사회에게만 부여된 권함임을 알기에.. 자신은 결코 상류층과 동일한 기준의 심판대에 설 수 없고, 행여 최후진술로써 살아서 감옥을 나오더라도 결국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고, 미련 없이 최후진술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비장한 죽음을 택한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20세기 초중반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로 묘사된다.
소설의 도입부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하여 뫼르소가 장례를 준비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뫼르소에게 있어 어머니의 죽음은 일종의 삶의 ’순차적 절차’ 같은 것이어서, 가족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임무'로서 장례를 수행한다. 장례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간 뫼르소는 같은 건물에 사는 레몽을 만나게 되고, 그와 조금은 가까워진다.
레몽은 뫼르소에게 자기 친구의 별장에서 같이 주말 동안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하고, 당일 뫼르소와 그의 여자친구인 마리, 레몽은 별장으로 향한다. 뫼르소는 그 해변에서 우발적으로 아랍인에게 총을 발사하게 되고, 결국 그 아랍인은 목숨을 잃는다.
뫼르소는 결국 수감되고, 재판과 심문의 나날이 반복된다.
뫼르소의 변호인은 필사적으로 재판에 임하지만, 검사를 비롯하여 등장하는 증인과 참고인들은 하나같이 뫼르소의 죽음이라도 바라는 듯, 뫼르소에게 불리한 각종 발언들로 재판의 논리를 채워가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재판장 안에서 뫼르소는 발언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며 홀로 '이방인'이 되어 앉아있다.
뫼르소를 스쳐갔던 참고인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커피를 마셨다거나, 담배를 피운 것, 그리고 울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어머니의 시신을 보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뫼르소에 대한 판결을 마쳤으며, 그가 어머니의 장례에 있어 무심해 보인다는 이유로 어느새 파렴치하고 냉담한 살인자로서 죽어야 하는 신세가 되는 꼴이 된다.
검사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비헌신적이고 무심했던 ‘냉담한 살인자 뫼르소'가 그날 해변에서 아랍인에게 총을 쏜 행위에 관해서도 자세한 경위 파악도 생략한 채, 이미 사전에 모의된 행동이었음을 판사에게 피력하게 되고, 끝내 뫼르소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뫼르소는 더 이상의 반박과 진술 기회를 거부하는데, 뫼르소 역시 쥘리앵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곳에서 비록 살아남게 되더라도, 세상과 사람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던 것 아니었을까?
쥘리앵과 뫼르소 모두 자신이 타인들과 달랐음을 간파했고, 이것이 그 둘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헸다.
만약 두 인물들 모두 타인들과의 차이를 지우고 타인과 대중의 기준 속에 편입되기 위해서 노력했다면, 아마도 살아서 감옥을 걸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라는 존재의 의미는 차이로부터 발굴되는 것임을 잘 알기에, 그들은 자신을 옥죄오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마저도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길 원했고, 끝내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차이'는 '불안'의 또 다른 형태적 양식이다.
누군가에게 있어 차이는 자신을 증거 하는 소중한 단서가 되겠지만, 분명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불안의 또 다른 양식일 것이다.
애석하게도 '내'가 '나'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행위의 근저에는 필연적으로 외로움과 고독함이 동반된다.
그 이유는 바로, 지금 이 삶과 자신의 의식은 결코 침략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에 다시없을 연인과의 깊은 사랑으로도.., 그리고 자신의 육신을 이어받은 자녀를 가져 보아도.., 결국 나의 이 의식과 나만의 삶은 모든 타 존재로부터 유리될 것이기 때문이고, 이것이 차이로부터 오는 '불안'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과 분리되어 결코 하나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고독과 불안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대중에 순치되고, 자신의 고유성을 지운다.
하지만, 그 끝은 공허함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다. 열심히 노력하여 드디어 타인과 같아졌음을 깨닫는 순간 그 자체가 자신이 존재하고 홀로 생각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였음을 마땅히 허용하는 것, 자존감
스스로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욕망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신이 하나의 닫힌 존재로서 고유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시기를 언젠가는 거쳐야 할 것이다.
반드시 같아짐을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지만, 내가 나임을 안다는 사실 만으로도, 자신의 모든 선택과 행위에서 의미가 발생되고, 또한 자신을 바라보는 메타적인 시야를 가지게 될 수도 있거나, 언젠가 삶이 힘들고 지칠 때 내가 나 자신에게 셀프적인 구원의 손을 뻗어줄 수도 있게 될지... 또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아마도 '자존감'이라는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