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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그 편린적인 시간 속에서[리뷰]

<모방에 의한 지배>

by 춘고

[자신이라는 자아의 모방물 보다 더 정확한 참조물이 없기 때문에, 나는 모방에 의해 지배된다.]


-오늘 왜 전화 안 했어요?

-싫어할까 봐요.

-그럼 다신 전화하지 말아요.


영화에서 말해지는 대사들처럼.. 진심을 언어 속에 감췄지만, 서사와 은유를 통해 진심은 길어 올려진다.

또한 진심은 어디에도 숨겨질 수 있다. 같은 방 안에서도, 혼잡한 골목길에서도, 모두가 운명공동체처럼 뒤섞여 살아가는 복잡한 연립주택에서도...

하지만 그렇게 숨겨진 진심은 일종의 시한폭탄과도 같은 것이어서 언어적으로, 그리고 행동적으로.. 언제 그것이 외부로 드러나게 될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진심은 숨는 것이 아닌, 그저 자신이 드러날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진심과 비진심이 뒤섞여 마치 쏟아지는 비처럼, 허무한 담배연기처럼.. 이윽고 흩어진다.


모방

담배연기는 담배 그 자체를 모방하고, 밤 길 조명 아래를 걸으며 뻗어나간 자신의 그림자, 그리고 한 켠의 거울에 반사된 형상은 자신을 모방한다.


그러나 모방은 언제나 본질을 가린다. 담배연기는 자신의 근원인 담배를 대신하며 본질을 가리고, 그림자나 거울 속의 모습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나 자신의 본질이 거기에 가 있지는 않다.

모방은 자신이라는 본질 중 일부만을 가질 뿐, 결코 그 자신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모운과 려진은 서로의 배우자를 상대로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들을 모방하며,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진심을 가린다.

'배우자의 불륜'으로 인하여 발생된 모운과 려진의 은밀한 만남은 결혼생활의 파국적 현실을 직시하고, 동일한 아픔을 가진 자들의 위로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로에게 가진 호감을 적절히 숨겨가며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마치 영화 속 사람들이 마작을 하는 것처럼, 서로를 속이면서 동시에 친목을 하듯이, 자신조차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고 교묘하게..


영화는 내내 행동과 대사(언어)로써 진심과 비진심이 뒤엉켜지고 있는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감정을 그리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 사건을 진행시키는 대사(언어)와 행동은 감정의 모방물이다.

때문에 감정적 모방물로서의 모든 언어와 행동은 결코 감정의 진의를 완벽히 묘사할 수 없고, 그렇게 모든 감정은 쏟아지는 비처럼, 흩어지는 담배연기처럼 한 순간 모였다가도 이내 분산되어버린다.


나는 나로부터 폐쇄되어 있다.

자아와 감정은 자신이라는 육체의 구조물 속에 속박되어 외부로 날 수 없으며, 그렇게 육체라는 벽은 타인과 맞닿는 경계면이자 넘어설 수 없는 감정의 벽이다.


또한 공간과 공간 사이를 가르는 물리적인 벽은 실제적 공간을 분리하는 것을 넘어, 단지 벽으로 가로막혀 자신의 시야에 닿지 못하게 되는 사실만으로도 실측되는 직선거리의 근접 여부와 관계없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를 창출한다.

이는 물리적인 벽이, 앞서 말한 육체적 벽의 2차 모방물이라고 충분히 간주할만한 영향력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으며, 때문에 아무리 벽 하나만을 사이에 둔 바로 옆 방이라 할 지라도 '타인과 다른 공간에 놓여있음' 그 자체는 어쩌면 타인과 나 사이에 적어도 2개 이상의 벽을 마주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모운과 려진 역시 물리적으로는 매우 근접한 서로의 옆 방에 머물러 있지만 그들의 주위에는 <육체의 벽>, <물리적인 벽>,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감시의 벽>에 의해, 둘 사이의 감정적 거리는 켜켜이 벽들로 가로막혀 있으며, 그들의 행동 양태가 진실한 감정의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불이행되고, 기어코 머뭇거려지는 이유는 결코 서로 닿을 수 없는 '벽'으로 생겨난 필연에 의해서라 할 수도 있겠다.


편린

삶은 지속적인 사건들이 쌓여가며, 사건으로 인해 다른 사건들은 조금씩 편린이 되어간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


'화양연화'가 가진 본질은 결국에는 국소적일 수밖에 없는... '하나의 무렵'이 되는 것 이외엔 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다.

모운의 대사에서처럼..

<옛날 사람들은 숨기고 싶을 비밀이 있을 때, 산에 가서 나무에 구멍을 낸 다음 거기에 비밀을 털어놓고 구멍을 진흙으로 막았대.>

이것은 애석하게도 삶이란 '참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시간에 복무하는 삶 속에 떠밀려가기엔 소중한 비밀을 어딘가에 간직하고픈 깊은 간절함이...

그것이 오랜 기간 살아왔던 나무이거나, 아니면 모운의 비밀을 보관한 장소처럼 오랜 세월 속에서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사원이거나..

오직 시간이라는 파도를 견디며 서 있을 수 있는 안정적인 그 무엇이라면..


막대한 시간 속에서 한 사람의 수명은 찰나겠지만,

하나의 사람의 시야 속에서라면 삶은 길다.

때문에 그러한 시야 속에서 화양연화는 짧을 수밖에 없으며, 짧았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서 <화양연화>라 불려지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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