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과 영역 사이를 보는 시야>
우리는 언어로써 감정을 규정하지만 감정 상태의 정확한 진단은 것은 단지 언어만으로 포획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어떤 대상의 호감도를 한 줄 수평선의 그래프로 나타내 본다면, 양 끝단에 각각 자리한 좋음과 싫음 사이, 언제나 감정은 그 중간 어딘가에 좌표가 놓여있지 않을까?
게다가 그 좌표는 항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매 순간 인입되는 자극에 따라서 다소간의 진폭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일정의 평균을 내었을 때, 거시적인 경향성을 관찰함으로써 감정의 상태나 크기를 가늠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감정을 규정하는 인간의 언어는 일종의 디지털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명쾌하게 규정된 영역/구획이 아닌, ‘영역과 영역 사이’의 미세한 감정선까지, 단지 언어만으로 규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
예컨대 어떤 사건에 대응되는 감정의 좌표가 ‘매우 좋음’보다는 조금 아래, ‘보통 좋음’보다는 조금 위에 놓여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 상태를 언어로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덜 매우 좋다. 아니면, 약간 매우 좋다…?]
마치 제논의 역설에서처럼 무한히 언어를 미분하여 어떻게든 좌표에 맞게 표현을 만들어 볼 수도 있겠지만(더욱 덜 약간 매우 매우 조금, 조금의 더 조금조금… 뭐 이런 식으로?) 분명 자연스럽지는 않아 보인다. (어쩌면 나의 언어 능력이 부족한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실제로 감정이 우리의 규정된 언어와 언어 그 사이에 위치할 수도 있지 않는가?
즉, 단순히 기분이 좋다고 말했을 때, 여기에서 좋다는 정도는 과연 얼마큼일까?
누군가가 연인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 사랑스러움의 정도는 대체 감정의 좌표평면 상 어디부터 사랑스러움의 진입구간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좋아함과 사랑함의 구별이 시작하는 지형은 어떤 양태를 가진다고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언어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감정이 언어를 쫓아, 언어가 만들어 낸 틀 안에 스스로 몸을 끼워 맞추는 것은 아닐까?
결국 언어가 가지는 한계는 마치 흔한 디지털 TV의 채널을 돌리듯 감정의 구별 방식을 1 채널과 2 채널처럼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는 있지만, 1.5. 채널. 1.6 채널… 1.65 채널을 섬세하게 구분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어는 다만 감정을 추측할 뿐 규정할 수 없다.’는 결론…
딱딱하고 괴상하게 시작했는데 … 아무튼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았다.
대략 10년도 더 전에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지만, 당시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가 이번에 다시 보니, 전에는 없던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오가더라.
우선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 이 영화는 과거 사랑했던 연인과 이별한 후 아니, 어쩌면 이별이 진행 중인지도 모를 현재에도, 여전히 전 연인에 대한 감정을 규정짓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물들에 대한 안타까운 서사를 그린다.
한때는 누구보다도 깊은 연인관계를 유지했던 두 인물이었지만, 끝내 헤어진 후에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별을 규정했지만, 단지 이성으로 주파한 논리적 이별과,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감정 좌표의 간극 속에서 표류하며 생겨난 후유증으로 인해, 삶의 방향타를 잃어가는 장면들이 긴 러닝타임 동안 어쩌면 장황하리만큼 표현되고 있는데…
사실 인간은 한 방향성을 가진 공통된 삶에 복무하지만, 개별적으로는 완벽히 닫힌 '계'로서, 감정 사이의 영역만이 아닌,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영역 역시 존재한다.
감정은 그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영역에서 흐르고 있으며, 우리가 소위 말버릇처럼 인간관계가 어렵다고 하는 것도 결국은, 영역 사이의 감정을 명확하게 진단하고 구별해내기 곤란한 이유일 것이다.
그 지점으로부터 영화는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전후반 내내 난해하거나, 답답한 장면들이 ‘장황히’ 연출될 필요성이 있어 보였다.
처음과 끝, 그리고 중간.
우리는 삶의 대부분을 중간(사이)에 산다고 말할 수 있듯이..
마치 회화에서의 중간톤처럼, 시작(밝음)과 끝(어둠)은 단순하고 명확하지만, 빛과 어둠이 만나 마찰과 파열음이 발생하는 중간톤으로부터 회화는 말해진다.
현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성공과 실패, 탄생과 죽음, 사랑의 시작과 이별... 이것은 운전하며 스쳐가는 하나의 이정표로서 시간적으로도 찰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사이의 중간 과정들은 밀도 있게 공간을 채우고 있으며, 우리는 거기에서 발생하는 복잡하고 많은 이야기를 길어 올릴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냉정과 열정 사이’는 결코 인간의 언어적 사고만으로는 수치화할 수 없는 감정적 중간단계의 복잡성으로부터 어떤 감흥을 길어 올리려는 시도를 했을 것이고, 그것을 가능한 분명히 그려내고자 했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주인공은 감정적 기복이 없어야 했을 것이고(감정의 기복이 분명할수록 그 복잡성은 감속되기 때문에...), 때로는 한 번에 이해하기 난해하거나 구태여 답답한 모습을 찾아내 보여야 했을 것이다.
영화는 충분히 감속된 행동으로써 복잡한 심리를 드러낸다.
다름에 대하여… (다름과 다름 사이)
‘중간’이라는 개념으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두 개 이상의 다름이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00과 00 사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채울 수 있는 공감각적 개념도 혼재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가능성/기능성 그리고 처음과 끝, 탄생과 죽음처럼 양 끝의 성질이 다르듯 중간은 사이를 잇는 어떤 유동적이며 변동성을 포함한다.
문득 이 영화와 결이 비슷한 다른 영화로는 우리나라의 ‘봄날은 간다’가 떠오르는데...
‘냉정과 열정사이, 봄날은 간다.’ 두 영화의 인물들이 이별의 공포를 대처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
누군가는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자책하며 이별을 받아들이거나, 누군가는 다른 만남으로 시선을 돌리는 방식이거나, 어떤 이는 상대를 가능한 미워하거나, 현실을 외면하거나...
서로 다름을 가진 존재로서 내는 파열음은 어떤 소리를 내는지, 파열음과 함께 퍼지는 진동은 양 끝에 연결된 존재들에게 각각 어떤 진동을 전달하고 무엇을 이해시키는지..
타인의 다름을 관찰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이해는 동시에 세상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이 늘어나는 것일지도.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잉크가 물에 번지듯 서서히 느끼는 사람도 있는 거야…”
다른, 모든 존재의 완전함
하나의 존재는 곧 하나의 완전함으로 대응된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다면 완전함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완전함’ 그것은 더 이상 보태거나 뺄 수 없는… 즉, 타 존재와의 비결합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신성화된 사회에서 그려지는 인간은 불완전성의 본질을 지닌, 즉 죽음 이후의 완전한 신의 세계로 병합되어야 할 그 무엇의 의무감을 가지며 평생 완전함을 갈망하는 존재였다면…,
더 이상 신이 나의 존재를 대변해주지 않는 실존주의가 휩쓸고 지나간 현대사회에서의 인간은 모든 기능을 제거했음에도 삭제될 수 없기에 실존하고, 가치를 잃은 채로 좀비처럼 떠돌아다녀도 절대로 타 존재와 병합될 수 없이 홀로 완전히 동떨어졌으며, 그것만으로도 완전하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밖에 없이 저주받은 존재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수긍이 되기도 한다.
이토록 인간 한 명이 완전한 하나의 존재라면, 또 다른 완전한 인간 존재의 거리로부터 사이(영역)가 발생하게 되며 동시에 두 명의 동일하지 않은 존재, 즉 ‘다름’이 발생한다.
하지만 실존적 존재는 그 중간의 영역에 결코 포함될 수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실존적 존재는 일종의 디지털이기 때문에, 각각 하나의 공간을 완전히 점유하여 끝내 겹쳐질 수 없고,
틈이 없이 빼곡한 두 개의 다른 존재 사이의 영역은 오직 '비존재(감정, 언어 등)'만이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존재는 존재와는 달리, 존재와 결합하여 존재의 상태적 변화를 줄 수 있는 유동성을 가졌기 때문에 존재와 존재가 맞닿는 단면을 유착시키거나, 때로는 분리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가 비존재 영역(감정, 감성, 관계, 언어, 사상, 철학……)을 유심하게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 삶에서 드러나는 다름에 대하여 무엇이 다른지, 어째서 다른지를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이'를 볼 수 있는 시야가 필요할 것이고, 그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삶은 더 흥미롭고 다양해질 것이라 생각되며,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많은 답을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