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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과 단테의 '신곡'을 읽고[리뷰,생각]

<세상의 음지에서 길어 올리는 빛>

by 춘고
의미의 발생


당신은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존재에 대한 의미는 둘 이상의 존재로부터 발생한다고 믿는 편이다.

홀로 존재하는 존재가 그 자체 만으로도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다수의 존재들 간의 주체와 객체적 관계 속에서 존재의 많은 의미들이 발생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인데..

예컨대 '나'라는 존재가 타인과 비교하여 키가 크거나 작음이 구분됨으로서 의미가 규정되거나, 내가 행위했던 사실이 타인과 사회 속에서 어떤 의미로서 규정되는가. 즉 인간의 의식이 사회를 규정짓는 것이 아닌 사회가 인간의 의식과 의미를 규정짓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것.


이렇게 나라는 개인이 자문과 자답하는 생각의 관류 속에서 우연히 연속적으로 읽게 된 책이 '공산당 선언'과 단테의 '신곡'이었다.

공산당선언과 신곡

이 두 책은 공통적으로 각각 하나의 규정된 세계를 서술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관계 속의 '의미의 파생'에 대하여 언급했던 것처럼 책에서도 천국을 의미를 알고 천국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지옥을 알아야 하듯이(또는 그 반대로), 그리고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대양 속에서 자본주의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대편의 세상을 인지할 수 있어야만 현실의 세상을 더욱 메타적인 시각으로 명확히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점에서 어딘가에서 들었던 말이지만 대단히 공감가는 말이었는데.. 세상을 살아가며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한두 권만 꼽아보자면 '공산당 선언'과, '성경'이 아닐까? 이 두 가지 책은 한 때(.. 아니 어쩌면 여전히) 지구 절반의 담론을 지배했던 거대한 세계관을 담은 책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고귀하다. (사실 성경은 아직 읽지 못했지만;)


사실 이번에 주로 말하고 싶은 책은 '공산당 선언'이다.

언젠가는 꼭 한번 읽어야겠다.라고 생각한 지는 오래였으나 이래저래 다른 책들에게 밀리다 보니 이제야 읽게 되었는데, 다 읽고 나니 이 얇은 책이 뭐라고 이렇게 늦게 읽게 되었는지..더 빨리 읽었으면 좋았을걸 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세상의 반대편


오직 자본주의 세상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풍문처럼 들어왔던 공산주의는 사실 긍정의 의미보다는 부정적 의미로서 인식되고 있을 것이다.

냉전의 세상 속 어느 한 체제에 속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역사의 관류 속에서 이 나라는 자본주의에 편입되었고,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체제에 속한 이상 대척에 존재하는 공산주의의 그 모든 것들은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되었다.

더구나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이 이어지면서 마르크스의 예언과 함께 공산주의는 일종의 조롱거리마저 되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렇게 정신없이 자본주의의 승리감에 도취되고, 규정된 적국을 비하하고 조롱에 몰두하다 보니 문득 자각되는 현실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던가?

사회의 자본과 발언권은 어째서 소수에게 집약되어 있는지, 어째서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도 적당히.. 아니면 그 이하로 먹고살 만큼만 벌고 그 이상의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지.


이러한 물음과 자각되는 지점에서부터 공산주의는 다시 시작된다.


인간소외 그리고 마르크스

자본주의가 세상을 뒤덮으며 발생되는 현상 중 가장 슬픈 것은 무엇일까? 단연 '인간소외' 아닐까?

인간이 인간을 매매의 관계로 만들고, 동물적인 생존본능 속에서 강자가 독식하며 그 독식으로써 축적한 자본으로 더욱 공고하게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넓히는 구조 속에서 약자는 강자만을 올려다보는 관계가 지속되고 인간 본연의 가치는 저하되며, 오로지 생존만이 가치의 제1순위에 오른다. 어쩌면 이러한 점에서 자본주의는 동물적 약육강식적인 '반지성주의'의 다른 말이라고 불려질 수도 있겠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나고 자란 내가 어른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로 공산주의는 개인의 사유재산을 빼앗고 제거하는 것이라고 들어왔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을 제거하는 것은 오히려 자본주의이지 공산주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본이 오직 소수에게 집중되며, 그 외 나머지 계급은 소수만을 바라보며 삶의 안위를 구걸하는 세상.

결국 인간이 인간을 매매의 관계로 만든 세상은 자본주의이지 공산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있다고 서술하지 않는다.

그는 고대와 중세 왕정시대 이후 도래된 자본주의가 부족함 없는 현실적 유토피아 실현, 시장의 확대로 인한 세계의 통합으로써 인류가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성취적 증명이며 역사 발전의 관점에서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즉 부르주아 계급이 앞장서는 자본주의는 인간이 역사적으로 가질 수 있는 '발전단계'로서 바라보지만,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가지는 한계성(인간소외)에서부터 다시 시선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갈 이상향의 방향성을 모든 개인의 존재적 가치를 놓치지 않을 '철학으로서의 공산주의'를 제시한다.

이러한 점에서 공산주의는 매우 포스트 모더니즘적이라 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의 그림자 속에 소외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희망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예언했던 자본주의의 몰락의 실현 여부를 떠나서 과거시대 사람인 마르크스가 보여준 통찰력은 이 책을 읽어 내려갈수록 가히 대단하고 느껴졌다.

그가 이미 말했던 바와 같이 '과잉생산'이라는 전염병이 세상을 지배하고 전 세계의 인류가 그 생산과 소비의 굴레에 잠식당하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대립의 단순화는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하지 않은가.


사회가 나아갈 방향성과 결과, 즉 자본주의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결과가 물음표라면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관계적 분석에 매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회에서 통용되는 '공산주의'는 그 실현으로서가 아닌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철학적 위치에서 메시지를 길어 올림으로써 작금의 현실적 상황을 명확하게 바라볼 시각을 제공하고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조타륜이 되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현실의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은 한 마르크스는 여전히 우리 곁에 유령처럼 떠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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