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이란..>
하나의 애정적 감정이 직선적으로 상대의 전면에 가닿는 경우도 있겠으나, 수많은 장애물들을 우회하여 상대의 배후에 종착하는 감정도 있을 것이다.
제 아무리 순수의 근본에서 우러나는 애정적 감정이라 할지라도, 현실이라는 대전제와의 가치판단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판단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연인에게 부여되었던 '하나의 사랑'이라는 감정의 결이 서로 달라지기도 한다.
헤어질 결심
어째서 제목이 <헤어질 결심>이었을까?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고민 끝에 현재까지의 내 생각은 이렇다.
우리는 평소 '결심'이라는 단어의 쓰임을 보통 1인칭, 즉 주관적인 표현으로 사용한다.
결국 결심이라는 것은 어떤 '최종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결심의 최종 주도권자는 개인의 자아, 즉 자신으로부터..라는 1인칭의 관점이 부여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하나의 언어에서 분화된 각자의 '다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영화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극명하게 나뉘어 전개된다.
전반부에는 두 사람 '해준'(박해일 분)과 '서래'(탕웨이 분)의 일종의 로맨스가 전개되며, 후반부에는 어긋난 두 사람의 갈등과 결말을 그린다.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미학적인 면에서 매우 좋아하는데, 단지 배경의 미술적 영역뿐 아니라 감독이 잡아내는 인물의 심리적 앵글과 포커싱이 일품이라 생각한다.
전반부 두 사람이 점차 가까워지는 시기에는 한 화면에 두 인물이 나란히 놓일 경우 강렬한 포커싱으로 서로를 대비하거나, 한 인물은 모니터 화면으로, 다른 한 명은 실제 모습을 비추며 서로가 타인임을 강조한다.
이후 두 인물의 관계가 가까워짐에 따라 서로 물리적으로 멀리 위치했음에도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하며, 심도 깊은 포커싱의 대비가 이전에 비해 줄어드는 변화를 보는 재미도 있었다.
감정의 유사성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 철학자가 떠올랐다. 바로 독일의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영화는 140분에 가까운 러닝타임 내내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고, 사랑의 과정을 그리지만 결코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말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해준)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서래)
우리는 언어로써 감정을 포착하고 감정의 경계를 구획 짓지만, 실제로 감정은 하나의 감정만 오롯이 발현되는 것이 아닌, 복합적인 감정들이 뒤섞이는 과정에서 어느 한쪽이 조금 더 짙은 경향성을 띠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 속에는 수많은 감정을 동시에 담지한다.
질투, 시기 , 증오, 분노, 가여움, 아름다움, 존경, 복받침, 열정, 포만감, 그리움, 소유욕...... 등 당시의 물리적 상태와 각 감정의 함유량에 따라 발현되는 경향성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위에 열거한 감정들은 단독으로 사용될 수도 있겠지만, 어떤 하나의 감정 속에 조금씩 포함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서래'와 '해준'이 서로에게 가지는 감정을 단순하게 '사랑'이라고 분류할 수도 있지만, 사실 유사할 뿐 엄밀하게는 서로 다른 감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이유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가족 유사성>으로 비유하는데,
아들은 아버지의 눈과 어머니의 귀를 닮았고, 딸은 어머니와 머리색이 같고 아버지의 입술이 닮은 것처럼, 각자 개별적으로 볼 때는 서로 다르게 생겼지만, 전체적으로는 유사한 것을 말한다.
그는 이러한 유사성이 언어에서도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가령 당신이 말한 '사랑' 그리고 내가 말한 '사랑'은 경향적으로는 같은 감정을 말하는 것이 맞지만 개별적 차원에서는 유사하지만 분명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연장에서 '해준'과 '서래'의 사랑은 아주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유사하다는 것을 영화의 전반부에 표현하고 있으며, 후반부에는 이들의 사랑이 결국은 같지 않았음을 강조하여 보여준다.
제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나요? (해준의 대사)
서래는 해준이 과거에 자신을 사랑했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하지만, 해준은 서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서래가 사랑을 고백받았다고 했던 바로 그 순간이 해준에게는 이별을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인간은 자아의 경계 안에 머무른다. 결코 갈라파고스와도 같은 자신의 육체 너머로 가닿을 수 없으며, 그저 각자 근방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영화의 끝도 '갈라파고스적인 이별'을 맞이한다.
한 사람은 수면 위에서, 나머지 한 사람은 수면 아래에서 이계(異界)적인 이별을...
그렇게 존재는 서로 다른 차원에 살고 있으며, 그저 '공간'이라는 교집합만이 있을 뿐이다.
어른의 사랑?
우리는 현실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많은 부분을 자신의 틀 안에 가두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사랑'은 '선의'로 둔갑되기도 하는데, 사랑의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하거나, 상대도 나와 같을 것이라는 오해가 발생된다.
흔히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여기서 '첫'이라는 것의 의미는 비경험에 방점을 두고 말하는 것일 텐데. 즉 다음 사랑은 더 잘할 것이라는 예측을 기반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우리가 첫사랑을 딛고 다음 사랑으로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타인에 대한 경험의 축적일 것이며,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와 나의 차이를 얼마만큼 인지하는가. 아마도 이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하나의 과정을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런 차원에서 '어른의 사랑'이라는 것...
그것은 서로가 사랑함에 있어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수도 있음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사랑은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 되기도 하고, 감독 스스로가 '어른의 사랑'을 강조했음에도 오히려 정사 신을 배제한 이유도 아마 서로가 결국 같을 수 없는 '타인의 한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철학자의 말은 바로 이 모든 걸 두고 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이 글을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