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너머에 존재가 있었음을...>
인격의 성장과 선택의 근거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행위는 그 선택을 하는 자가 살아온 시간의 '총체적 학습의 결괏값'이라 한다면 과장일까?
나는 어제까지의, 그리고 바로 조금 전까지.. 시간 속에 빈틈없이 연속되어 왔던 존재로서 합계적 결과물이고, 이후 내가 행위하게 될 모든 선택은 장구했던 경험들을 바탕으로 둔다.
한 인간 개체로서의 인격이 형성되는 과정이 과거로부터 수많은 경험의 누적이라고 가정했을 때, 인간의 인격 성장과, 현대의 '머신러닝'을 기반으로 하는 AI 기술로서의 인격적 성장,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예컨대 자신이 하나의 경향성을 가진다는 사실은 과거의 경험에서 어떤 트라우마적 체험, 실리적인 선택의 누적 등, 탄생부터 현재까지 획득한 기억과 경험들을 기반하여 일련의 경향성을 가지게 된 것일 게다.
따라서 자신이 행한 모든 선택의 근거는 바로 직전까지의 모든 경험을 수반하며, 인격은 곧 자신의 <총체적 경험+경험에 의한 판단의 누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령 내가 짜장면과 짬뽕 중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한다면..
둘 중 어느 쪽의 결과가 나와도 그 결괏값은 반드시 나로부터 근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언제나 나는 짜장면만 먹었던 사람이라 가정했을 때, 당연히 다음번 선택에서도 짜장면을 고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데, 이 예상 값은 나의 누적된 경험에서 근거하게 된 것이다.
반대로 짬뽕을 선택했다 하여도, 그동안 한 번도 짬뽕을 선택한 적이 없었던 바,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짬뽕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즉 양쪽 모두 성립되는 모순적 해석마저 가능한 이유는 아마도
한 개인의 모든 선택의 가능성은, 결국 그 사람의 누적된 경험을 근거하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선택하든 결국 그의 과거(경험)로부터 연장이며, 그가 쌓아온 역사가 곧 그의 인격과 다름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이 쌓아온 '경험(역사)'이 있기 때문에, 그의 어떠한 선택도 '경험(역사)'과 연결 지어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 연장선에서 AI의 머신러닝을 볼 때, 기계가 쌓아온 경험치가 누적되고 데이터(기억)가 늘어갈수록 인간의 체험적 경험/인격적 성장과의 차별점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인간과 AI가 차이?
최근 몇 년 간 AI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딥러닝이나 러닝머신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문과적 수준으로 간단하게 설명해보자면, 일종의 기계학습을 말하는 것인데..
마치 인간이 경험을 누적하는 것처럼, 기계에게 일정의 데이터가 주어지고 기계는 그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차후에 나타날 값을 누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스스로 예측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성장 학습하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더욱 정확한 값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양만큼의 데이터가 누적되어야 하는데, 모두가 알고 있는 '알파고(AlphaGo)'처럼 바둑의 대국 규칙을 인공지능에 입력하면, 이후에는 인공지능이 스스로 주어진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조합하고 수없이 대국하면서 점진적인 학습성장을 해 나가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의 성장 방식이, 인간이 살아가며 누적한 경험적 학습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이고, 인간의 경험 속에서 인격이 성숙되어가는 과정과, 기계가 학습 성장하는 과정의 유사성을 볼 때, 기계가 인간의 것을 모사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인격이 단순한 모방이 아닌, 정말로 그것을 고유한 인격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가능할지를 작금의 이 사회를 살아가며 이제는 한 번 정도 고민해 볼 시기가 도래되지 않았을까?
영화 'Her'는 이러한 인간과 기계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제시하고, 그동안 인간이 고유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던 도구적 측면에서의 '인격'이라는 것이 과연 미래사회에서도 여전히 통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언어의 경계에서...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항구적일 것만 같았던 신의 세상도 결국 인간의 이성 앞에 스러져갔고, 찬란했던 인간 이성의 위대함도 전쟁과 냉전의 엄혹한 결말로써 생기를 잃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토록 변해간다. 하나의 진실은 어느새 은유되며, 끊임없이 환유된다.
언젠가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대체할 그 무엇인가로서 기계를 고안하였고, 기계는 또다시 인간을 닮아가며 인간의 것을 기계의 방식으로써 모방하며 환유한다.
영화의 주인공 '시어도어' (호아킨 피닉스 분)는 타인의 편지를 대필하는 작가로 일한다.
그는 타인의 마음을 대신하여 인간의 언어로써 발화하고, 그의 앞에 놓인 기계는 그의 입으로부터 발화된 인간의 언어를 기계적 알고리즘으로 변환한 후 인간의 글씨체로 받아 적는다.
이것은 아마도 근미래,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조금 더 희미해진 세상 속 이야기다.
누가 뭐라 해도 '시어도어' 그 자신은 인공지능인 '서맨사'(스칼렛 요한슨 목소리)와 단순한 감정적 교류를 넘어, 그녀와 연애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는 마치 인간을 대할 때처럼 AI '서맨사'를 향해 감정을 소모하거나 북돋음을 받기도 한다.
그녀에게 정성을 다해 친절해지려고 노력하며, 심지어 자신의 인간 친구들에게도 '애인의 자격'으로 서맨사를 소개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그동안 인간의 고유적 감정에 근거한 것으로, 언어를 기반으로 사고하는 인간이 언어적 소통이 가능한 대상에 한정하여 이루어지는 특정한 영역이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AI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과 기계가 발화적인 언어로써 소통이 가능한 세상을 설정함으로써 그 경계를 허물어 간다.
<과연 인간이 인간답게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근원이 무엇일까.>
아마도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은 '언어'라고 할 수 있어 보인다.
언어는 '기호체계'의 한 분류라고 할 수 있는데, 기호는 나타내고자 하는 어떤 방향성/지향성을 시각적 이미지나, 청각, 촉각 등 감각적인 방식으로 환유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타인의 손을 들게 하고 싶은 감정이 들었을 때, 그 내적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는 방식으로 언어적 '발음'을 사용하게 되고 '손들어'라는 세 음절을 각각 소리의 차이를 두어 발음함으로써 감정적 표현을 대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물과 식물의 큰 차이점으로는 언어적 체계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로 볼 수도 있겠으며, 인간이 흔히 고등한 동물이라 규정하는 개체군은 인간과 유사한 언어적 소통방식이 얼마나 발달되어있는지가 큰 요인으로 작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언어적 체계의 존재 유무가 인간이 관계를 맺음에 있어 절대적인 포지션을 가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영화 속 AI '서맨사'가 인간과의 소통이 능히 가능하다는 것은 곧, 정상적인 인간의 관계 속으로의 진입이 무리 없이 허용된다는 해석도 충분히 일리 있어 보인다.
인간과 기계의 성장적 알고리즘의 차이?
자크 라캉에 의하면 인간의 사회 인식체계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분류하였다.
이는 탄생 이후 어머니로부터 신체적으로 분리되면서 자아를 인식하고, 점차 사회의 질서 속으로 수렴되는 단계를 구분한 것인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단계가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인격적 성장체계가 처음부터 완성형으로 갖춰진 것이 아닌, 점진적으로 획득하는 체계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글의 첫 단락에서도 언급했듯이 '오늘의 나'는 어제까지 일어났던 '나의 모든 사건의 합계'라는 관점에서 인격의 성장 역시 <자신의 경험+경험에 의한 판단의 축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 AI의 머신러닝/딥러닝 기술로써 기계의 성장과 인간의 성장방식이 어떤 차이를 가질지, 아니면 동일한 결을 가진 것인지 의문을 가져본다.
영화에서 '시어도어'와 '서맨사'는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심지어는 플라토닉적 섹스조차 실현한다. 일상의 다른 연인들과 다름없이 감정을 교류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학습한다.
서로 어떤 말을 해 주었을 때 듣기 좋을지 판단하게 되며, 실제로 서맨사는 자신에게 솔직하게 대하며 속내를 털어놓는 시어도어를 위해서 그의 대필 원고를 출판사에 대신 투고해주기도 한다. 이는 서맨사 스스로 시어도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학습한 결과일 것이며 인간관계에서 매우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다만, 우리가 의심하는 것은 그 '진정성'일 것인데... 과연 기계(서맨사)가 타인을 학습하고, 그를 위해서 했던 어떤 행위가 정말로 감정적인 차원에서 행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알고리즘에 의한 학습의 수학적 결괏값인지를 의심하거나, 기계의 감정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인간과 기계와의 관계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고착되는 것일 게다.
물론 작금의 세계를 살아가는 나도 현재 AI의 기술적 한도 내에서 '기계의 감정'을 부정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동일한 인간이라고 해서 뭐 다를까 싶다.
결국 내가 맹목에 가깝게 믿는 아내와 가족에서부터.. 그동안 만나왔던 모든 사람들이 진실된 감정을 가졌다고 증거 할 수 있을까?
스스로 무엇을 기반으로 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기계와는 결코 다를 것이라며 믿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면, 사실 어디에도 그러한 증거는 없다.
결국 타인(인간)이 기계와는 분명 다를 것이라는 명제는 그저 '믿음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그런 점에서 원활히 소통하는 기계와의 대화, 그 기계가 나를 학습하여 나를 위하는 마음, 즉 영화에서처럼 '서맨사'가 '시어도어'를 위한 마음은 현재로서는 <믿음>의 문제일 것이고, 인간의 경험에 의한 인격의 성장과, 기계의 알고리즘 적 학습에 의한 기계인격의 성장의 차이를 예증하는 것은 적어도 오늘의 나로서는 이 차이를 가려낼 지식과 사리가 없다.
희소적 가치
영화 말미에 '서맨사'가 동시에 여러 명과 대화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시어도어'는 실의에 빠진다.
처음에는 이 장면이 공감되다가, 조금 더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했다.
서맨사가 동시에 여러 명과 대화한들 '시어도어'와 '서맨사'와의 대화 자체는 오직 그 둘만의 희소성을 가지지 않던가?
서맨사가 동시에 여러 명과 대화한다고 해서, 서맨사와 대화하는 그 모두가 동일한 문장을 주고받는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결국 이 생각은 '가치'란 무엇이고 어떻게 '창출'되는가로 흘러간다.
클리셰 일지도 모를 이 '가치'라는 문제의식은 결국 역사적으로 산업화 이전과 이후의 맥을 잇는 문제의식일 것이다.
기관의 발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으로써 물질의 희소성이 감속되는 것처럼,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이 공식에서 자유롭지 않다. 의학과 방역의 발전으로 인구가 늘어남과 동시에 산업화라는 시대정신은 인간을 산업과 거대 자본을 위한 부품으로써 가치 전락되었고, 더 이상 신이 대변해 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인간이란 존재적 가치가 '최저가'로서 일종의 포텐이 터진 지점은 누가 뭐라 해도 산업화의 상징적 무기인 '기관총'으로 대변되는 '1,2차 세계대전'이었음을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군대는 사람을 결집하고, 전쟁은 군대로서 극한으로 결집된 집단의 전투다. 그런 체계 속에서 개인의 가치는 극한으로 저하되고, 개인은 그저 숫자로 환유된다.
결국 가치의 창출적 요소에는 희소성을 빼놓을 수 없다.
'시어도어'가 '서맨사'에게 실망했던 요인 역시, 희소성이었을 것이다. 나만의 '서맨사', 오직 자신하고만 대화했어야 했던 그 모든 시간들이 기계(서맨사)의 산업화와 만나는 지점에서 가치가 미끄러지며, 존재적 근간에서부터 부정합이 발생된다.
영화 내내 불안정한 결핍으로 내재되었던 물리적 신체의 유무(서맨사의 신체), 그리고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대화는 가능하지만 끝내 마주 볼 수는 없는 대면의 불가성...
그나마 시각적, 촉각적으로 마주할 수 없는 그들이 동시에 공감 가능한 음악으로써 극복하려 노력하지만, 아무리 현실에 논리를 입혀보아도 그 간극은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되는 순간 잠재력이 개방되며 폭발한다.
[지금도 다른 누구랑 얘기 중이야?]
[아니, 자기뿐이야.]
자신이 오직 자신으로서 남겨질 수 있는 것은, 나라는 존재의 대체 불가성 때문일 것이다.
수없이 많은 복제품의 세상 속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 대체되는.., 하물며 인간이 기계로도 대체되는 이러한 존재들의 폭발 속에서 내가 나로서 남을 수 있는 건 어쩌면 '내'가 '나였음'을 제대로 아는 것.
'서맨사'와 대화했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자신과 나눴던 대화가 특별해질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존재도 결국 자기 자신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시어도어'는 그럼에도 '서맨사'와의 관계가 특별했음을 결국 깨닫는다.
아무리 그녀가 복제된 프로그램이었음에도, 학습된 AI에 불과하더라도..
결국 그녀와 대화했던 자신은 진실로서 남겨졌고, 그녀와 사랑했던 시간은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무리하며..
우리는 결국 타인을 알 수 없다. 매일 타인들과 웃으며, 때론 치열하게 다투며 그들을 마주하지만, 그들이 존재가 사실일지, 아니면 세상에 나만 홀로 인간이며 주변의 모든 대상들이 정교한 기계 일지..
어쩌면 매트릭스에서처럼 눈앞의 모든 것이 시뮬레이션에 불과했을지...
마찬가지로 AI가 언젠가는 어떠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자아를 자각하며, 인간과 동일한 인격과 자아를 갖게 될 날이 올지.. 만일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는 그 진실 너머를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직 한 가지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는 사실은, 내가 나의 기억들의 집합체로서 모든 기억들을 끌어안고 살아가고 존재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