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과 어떤 방식으로 비슷해질 것인가>
시차
종종 목적 없이 ott 페이지를 열어 유랑할 때가 있다.
무엇을 보고 싶은 것도 아닌, 그렇다고 안보려는 것도 아닌 애매한 감정의 중첩상태로 영화 포스터들을 하나씩 클릭하며 간을 보다가, 낮은 확률로 집어드는 영화가 있는데(대부분은 결국 아무것도 보지 않고 창을 닫으므로…) 이번에 걸려든 영화는 ‘미술관 옆 동물원’이다.
최근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서 이제는 스크린에서 볼 수 없는 ‘심은하’라는 배우에 대해 과거에는 모르고 놓쳤던 어떤 매력을 느끼고 있던 터라, 또다시 그 시절 영화를 고르게 되었다.
예전이라고 불러도 좋고 그 시절이라 불러도 좋은, 즉 현재로부터 충분히 멀어져 버린 영화가 좋은 이유는 그 시절 영화에서는 지금은 말해지지 않는 감정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 비해 생각보다 많이 달랐던 과거의 말투, 인식, 생활양식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시차(時差)는 현재의 나로 하여금 어떤 아련함을 자극하게 한다 .
또한 한때는 모두에게 익숙했지만 어느새 모두로부터 흘러가버린 거대한 세월은 어느덧 낯섦이란 이름이 되버렸지만, 영화는 그런 바래버린 시간의 축적물을 원하는 순간 화면에 인화함으로써 다시 한 번 과거로 회귀할 수 있게 하는 기술 집약체로서 일상 속에서 작용한다.
따라서 당시에는 놓쳤던 무수한 감정의 파편들을 채집하는 장치로써 그 시절 영화는 애써 찾아볼 만하다.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느낄 수 있듯 ‘다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절로부터 시차(時差)가 달라진 현재, 다시 과거의 영화를 보며 느껴지는주인공들의 시차(視差)를 통해 영화가 표현하고자 했던 다름에 대해 글을 써 본다.
다름
우리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회사? 집? 아니면 출퇴근하는 중의 길거리?
태어난 이후 쉬지 않고 여전히 살고 있지만 언제나 내가 놓인 장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한다. 그러므로 나는 집에서 살거나, 회사에서도 살며, 그 외 어느 곳이든 이 순간 내가 놓인 곳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생이 다하는 날까지 변하지 않을 단 한 장소를 말한다면 육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모든 감정과 모든 기억은 이 육신 안에 머물며, 매트릭스나 공각기동대에서 처럼 신체에 어떤 기계적 장치가 가능한 시대가 오지 않는 이상, 기억과 감정은 결코 외부로 반출되지 아니하고 언제나 내 안에 밀봉된 채 끝을 맞이할 것이다.
따라서 한 존재는 출항할 수 없는 무인도에서 사는 것과도 다르지 않으며, 저마다 다른 식생들이 자라 난 서로의 외연만을 바라본 채 결코 서로의 섬 속으로 탐험할 수는 없다.
그러한 숙명은 이 영화에서도 반영되어 현실 너머를 사는 여성인 춘희(심은하 분)와, 현실을 사는 남성 철수(이성재 분)가 만나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짐으로 인해 충돌을 겪지만, 조금씩 상대를 이해해 나가는 방식의 서사를 구성한다.
미술관 옆 동물원 = 추상과 구상 사이
미술관, 그리고 춘희와 다혜
우리는 대체로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모두가 바라보는 시야에는 각자 한계가 있으며, 시야의 외곽을 우련하게 둘러싼 눈꺼풀은 감각 밖의 영역으로 만일 두 눈 만이 우리의 유일한 감각기관이었다면 눈꺼풀 밖의 세상은 나로부터 유리된 미지의 대륙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술관에 걸린 액자 속 그림들은 사각의 프레임 속에서 전혀 다른 세상을 구축한다. 마치 더운 날에 들어간 시원한 미술관, 그리고 미술관 안에 걸린 액자 속 청량한 풀숲처럼 액자와 액자 사이마다 달라진 공기의 흐름이 관객의 감각을 자극하고 자기 존재를 인식시킨다. 그런 관점에서 미술관은 '액자 속의 액자'로 구축된 세계와 존재들의 나열이며 어떤 부분에서는 동물원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미술관은 멈춰버린, 어쩌면 죽어버린 세계의 향연이다. 존재로부터 제거된 시간이 죽음을 의미하듯, 미술은 대상으로부터 시간을 제거한 유사죽음, 또는 박제되어 버린 시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춘희는 미술관과 동물원 사이의 갈림길에서 미술관으로 걸어 들어간 인물로서 미술관을 상징한다. 그녀는 마치 살아있는 미술관이 된 것처럼 소설을 쓰는 동시에 결혼식 촬영을 담당하는 일에 종사한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삶을 온통 사각의 프레임 안에 가둔 채 바라보거나, 자신이 만들어 낸 소설이라는 액자 속 인물을 구축하는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녀의 프레임 밖의 생활은 자신의 감각이 닿지 않은 외부의 영역으로 인식하는 경향성 때문인지 프레임 밖에 위치한 집청소나 신체적 위생상태는 반드시 필요할 경우가 아니라면 언제나 후순위다.
춘희가 쓰고 있는 소설의 여주인공인 다혜(송선미 분)는 그녀 자신의 투영체로서 미술관을 안내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남주인공인 서인공(안성기 분)을 멀리서 지켜보거나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몰래 연모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춘희가 짝사랑하던 보좌관(안성기 분)에게 그랬듯 소설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다혜는 더 이상 서인공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자신의 만들어낸 상상 속에서만 사랑을 하는 액자 속 인물이다.
동물원 그리고 철수
앞서 말한 것처럼 미술관이라는 장소가 액자 속의 액자의 구조를 가진 멈춰버린(죽어버린) 공간이라면, 반대로 동물원은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삶이 생동하는 장소로서 동물원 속의 동물을 상징하는 인물인 철수는 언제나 현실적이며 당면한 문제에만 에너지를 쏟는 생존적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 그의 성격을 말해주듯 군인 신분으로 휴가를 나온 철수의 일상은 마치 어제까지 그의 일상이었을 군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자신을 배신하고 몰래 떠나간 옛 연인만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휴가를 나오자마자 자신의 본가로 가지 않고 전 애인의 집으로 찾아간 점이나, 애인이 이사 간 줄도 모른 채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가지고 있는 열쇠로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행동을 하는 등, 그의 삶은 온통 직관적이며 때때로 본능적이다.
하지만 철수는 자신이 감정이라는 우리에 갇혀있는 줄도 모르고 본능과 직관만을 내세우며 현실을 외면한 채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전 애인을 향해 어떻게든 매달리기 위해서 전 애인이 살던 곳에 새로 입주한 춘희의 집에 강압적으로 눌러앉으며 자유롭게(?) 행동한다.
철수는 언제나 현재 중심적인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거의 집청소를 하지 않거나, 좋아하는 상대에게 과감히 고백하지 않고 상상 속에서 짝사랑만 하는 춘희의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본다.
또한 춘희의 집에 눌러앉을 명분으로 자신보다 타이핑이 느린 춘희를 대신하여 노트에 적어놓은 소설을 컴퓨터로 대필하는 일을 해주면서 춘희의 소설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현실에서 춘희를 바라보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다혜가 서인공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에 못마땅함을 감추지 않는다.
영역을 넘어서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액자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자신만의 이념과 신념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본다. 그런 ‘self’라는 강한 자기 관성적 시스템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는 순간은 어쩌면 우연과, 또는 우연을 넘어 대상을 인지할 정도의 감각을 자극할 ‘다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춘희에게는 우연히 자신의 액자 속에 어떤 감각질로서 보좌관이 들어왔던 것이고, 보좌관이 바라보는 액자 속에는 단지 그녀가 없었거나, 있었다고 한들 인식할 수 없을만큼 여타의 배경들과 동일한 질감의 그 무엇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미술관은 동물원 옆에 있다. 처음엔 자신만의 궤도를 돌며 살아가던 춘희와 철수였지만 시공간을 공유한 끝에 비로소 그들이 서로의 중력에 이끌리듯...
자신의 발에 길들지 않은 새 신발이 언젠가는 오직 자신의 발에만 들어맞게 되는 것처럼, 충돌과 마찰을 일으키면서도 서로의 다름이 조금씩 깎여나가는 과정에서 결국 맞지 않던 이가 들어맞을 때 온전한 만남과 인연이 완성된다.
낮과 밤, 서로 다른 시간에서 살아가던 사람이 가끔은 서로의 시간을 넘나들며 서로의 시간 속에서 산책을 하고, 서로 다르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일부분이 상대에게 서서히 물들어버리기도 한다.
결국 인연이라는 것은 다른 액자, 다른 세계관을 가진 존재들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써 다를 것인지의 문제일 것이다.
“나는 그대와 어떻게 다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