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실의 시대, 삶은 상실과 애도의 반복이 아닐 수 있겠는가.>
시간 속에서의 상실
상실을 시간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가.
어떤 마일리지는 그 보존기간이 5년이었다. 그래서 적립한 날로부터 5년 간 사용되지 않은 마일리지는 순차적으로 소멸된다.
기억을 하는 존재에게 있어 상실도 그런 것은 아닐까?
마치 마일리지와 같이 기억이 적립된 날로부터 일정기간 멀어질수록 강렬했던 순간의 기억도 시간이라는 폭주한 열차의 연료가 되어 타들어가 버리고 결국엔 흐릿한 잔해만 남게 되는…
그러므로 상실은 그 자체로 시간과 기억의 잔해다. 현재의 나로부터 사라져 버린 어떤 대상이 있었음을 증거 하는 언어, 어쩌면 일종의 상흔.
만일 상실했다는 것조차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면 그것은 존재로부터 도려나간 사실상 ‘없음’과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서 상실은 ‘무’가 아닌, 없는 방식으로서의 ‘유’로 규정할 수 있는 것.
한 존재로서 시간을 감당하고, 그 안에서 많은 것을 인식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상실을 되풀이한다.
지금도 나는 1초를 흘려버린 나로서 1초 전의 나를 잃었고,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다시 1초만큼 살았으며, 여전히 시간 속에서 기억과 대상들을 잃어나갈 것이므로, 아마도 상실은 시간 속에서 획득된다고…
끊임없이 상실을 열병처럼 앓다가 마침내 자신의 시신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상실을 상실하고야 말 것이니, 존재는 연명의 방식으로 상실을 획득하고, 상실은 존재로부터 증명된다.
통각과 소유로서의 상실
상실은 고통일까?
몰락이 번영을 증거하고, 기억은 잊음을 묵시한다.
마찬가지로 상실도 소유로부터 은유되기 때문에 상실은 소유의 잔해다.
잃고 싶지 않은 자에게 있어 상실이 고통의 한 종류라면, 그가 사는 동안 놓쳤던 수많은 것들 중 고통을 준 것 만을 상실이라 하겠다.
통각이 통각으로서 작용되기 위해서는 통각자와 통각 사이의 방향이 서로 역행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고통은 수동적이거나 피동적이어야만 하고, 상실을 고통으로 규정한다면 상실 역시 수동과 피동 사이의 어딘가에 놓여야 할 것이다.
가령 잊은 것과 잊어버린 것, 놓은 것과 놓친 것, 간 것과 가버린 것의 차이를 능동과 수동의 차이로 보고 상실을 규정한다면 후자를 상실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상실이 고통인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건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상실은 그저 없는 것과는 다르다. 즉 있음으로부터 은유되는 것, 또는 없는 방식으로 있는 것.
시간적으로는 소유에서 상실로 상태가 변형되고, 인식적으로는 엄연하게 ‘무’가 아닌 ‘유’의 성질을 유지한 채로 인식의 성질적 변화로 상실을 보았을 때, 상실이 고통인 이유는 인식이 감각의 변화를 따라오지 못해 발생하는 일종의 부작용이 아닐까.
다시 말해 물리적 신체는 대상의 변화를 감각했으나, 인식은 신체의 감각을 따르지 못한 채로 서로 분리되어버리고 마는 그런 것, 그 간극의 통증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상실은 획득의 다른 발음일지도 모르겠다.
상실의 표지
내 삶의 최초의 기억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아마도 누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삶에 있어 최초로 기억하는 장면이라는 것은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정확하게 첫 장면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 마치 어떤 영화의 장면이 서서히 디졸브 되어 다른 장면으로 전환되듯, 나의 최초의 기억도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시작되어 있다.
아마도 열 살? 아니, 열네다섯 살쯤 되었을까? 기억 속에서 ‘상실의 시대’는 우리 집에 원래 있던 책장에 원래부터 꽂혀있는 엄마 책이었다는 느낌일까. 그저 기억의 시작과 함께 놓여있던 책이었다.
‘상실의 시대’는 내가 유일하게 세 번이나 읽은 책이다.
먼지 쌓인 채 방치되고 있던 책을 처음 책장에서 꺼낸 건, 이미 스무 살을 몇 년 넘긴 나중이었다.
알고 보니 그 책이 꽤나 유명한 소설이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고, 내용도 모른 채 단순한 호기심으로 읽은 것이 첫 번째였고, 몇 년 후 소설 속 문장이 주던 좋은 느낌이 생각나서 읽은 것이 두 번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 번이나 읽은 동안 그 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책으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시대성은 어떤 것인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단순히 문장이 주는 어떤 감흥만 느꼈을 뿐이었던 것 같다.
또다시 십여 년이 훌쩍 지나고, 최근에서야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건. 이제는 상실해 버린 나의 어린 날의 느낌이 어떠했는지, 그것을 지금도 여전히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서였다.
세 번째, 다시 한번 읽고 나서 느낀 건, 과거와는 다르게 이제는 행간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유추할 수 있는 내가, 이제는 과거의 나를 상실했음을 확정 짓는 그런 책이 되었다는 것.
멜랑콜리
‘멜랑콜리’는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가 사용한 의학용어로서 ‘멜라닌, 검은’을 뜻하는 ‘멜랑’과, 콜레스테롤처럼 둔탁해진 액체를 뜻하는 ’ 콜리’ 즉, ‘검은 담즙’을 뜻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의 4체액설을 근간으로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이 무기력해지는 증상에 대한 원인을 흑담즙의 과잉으로 제시하게 되면서 멜랑콜리는 우울을 유발하는 체액 또는 우울증으로 번역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에서 ‘애도’와 ‘멜랑콜리’라는 두 상태를 제시하며, 멜랑콜리는 일종의 완전하지 못한 애도 상태를 나타낸다.
애도
애도는 무엇이고, 애도는 언제 발생할까.
소설 '상실의 시대'는 서른일곱 살의 주인공 나(와타나베)가 비행기 속에서 문득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 숲’을 듣고 괴로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가 노래를 듣고 괴로워하는 것은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상실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소유로부터 상실이 은유된다고 했듯이, 애도는 상실에 근거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람, 반려동물, 물체, 기억, 이데올로기…어떤 대상이든 소유하고자 하는 충동적 욕망이 발생하며, 그 욕망의 크기에 따라 리비도가 지불된다. 하지만 그런 대상이 예기치 않게 상실되는 과정에서 대상에 투사했던 리비도가 온전히 반환되지 못해 리비도의 불균형이 발생하며, 그러면서 인식적 교란 상태, 또는 인지부조화 상태가 되는데 그 불균형으로부터 ‘멜랑콜리’ 즉 우울감이 생긴다.
애도는 그 불균형을 되돌리기 위한 의식으로써 충분히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일 수도 있고, 깊이 슬퍼하거나, 상실감을 채워줄 또 다른 대상을 찾아 대체하는 것으로 회복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애도가 어려운 이유는 상실한 대상이 대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는 것. 가족이나 친구 반려동물처럼 고유성을 가진 존재는 대체나 교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존재들에 대한 애도는 필연적으로 완성되지 못할 애도일 수밖에 없다.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가 애도했던 대상인 기즈키는 사춘기시절 그의 유일한 친구였고, 기즈키의 연인이자 자신의 연인이면서 동시에 기즈키를 잃은 상실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 것으로 믿었던 ‘나오코’마저 끝내 죽음으로 잃게 되면서 그는 깊은 상실 속으로 떨어진다. 멜랑콜리 상태가 된 것이다.
환유되는 욕망 속에서의 애도
와타나베는 나오코 이외에도 미도리와 레이코 두 명의 여성과 별도의 관계를 맺는다. 어떤 노래 가사처럼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짐’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접하는 상황이며, 존재(대상)는 그 자체로 욕망의 발원점으로서 대상이 있는 곳에 욕망도 발생한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에 대한 애정을 유지한 상태에서 미도리와 관계를 이어나가며, 이는 레이코와도 마찬가지다. 미도리의 경우 와타나베와 마찬가지로 둘의 만남 이전부터 관계를 이어오던 연인이 있지만, 각자의 연인들로부터 채워지지 않은 욕망은 타자에게 환유되어 나타난다. 그 환유된 욕망의 에너지가 와타나베와 미도리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게 해 주며, 와타나베와 레이코의 관계 역시 둘 사이에서 존재했지만, 두 사람으로부터 사라져 버린 나오코에 대한 애정(존재에 대한 욕망)이 타자에게 환유되고, 그 욕망의 끝에서 와타나베와 레이코는 격렬한 밤을 보냄으로써 상실한 나오코에 대한 일종의 애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불완전하지만 레이코와 함께 그 나름대로(?) 나오코에 대한 애도가 이루어진 와나타베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되고, 레이코와 작별한 후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날 잊지 말아 줘.
“날 잊지 말아 줘.”
"잊지 않을 거예요. 언제까지나."
와타나베가 레이코와의 작별에서 나눈 대사에서 알 수 있는 건, 상실은 언제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상실해 버린 대상은 그 나름의 방법으로 애도되고 대체된다. 그에 따라 리비도는 자신의 주인에게 상흔을 남길지언정 시간의 흐름과 함께 끊임없이 순환된다.
와타나베로부터 발생한 리비도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해 보면 그의 상실과 애도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나갔는지를 알 수 있다.
최초 와타나베의 리비도는 자신의 절친 기즈키에게 집중되었고, 그를 상실함으로써 얼마간 회수되지 못한 리비도는 나오코와의 재회를 기점으로 나오코에게 집중되었지만, 심리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나오코에서는 기즈키에 대한 애도와 그리고 리비도의 집중도 완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만난 미도리에게도 역시 리비도는 온전히 집중될 수 없었지만, 나오코의 죽음 이후 그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레이코와 함께 공유하고 애도를 이루어 내고서야 비로소 다음으로 나아갈 리비도를 충분하게 회수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작품의 결말에서 와타나베는 레이코와 이별하자마자 얼마간 연락을 끊었던 미도리에게 비로소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게 되는 것이다.
시간에 따른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욕망(소유)의 상실은, 욕망은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그 중간에서 애도가 제대로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애도의 과정 속에서 철학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는 상실해 버린 인간(생명, 고유성)존재에 대한 완전한 애도는 가능한가. 또한 각자가 살아가는 동안 상실과 애도는 매 순간 반복될 것이므로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상실의 시대'가 되는 것일 게다.
우리가 애도를 하고, 또 다른 만남으로 과거를 딛고 나아가지만, 여전히 뒤를 돌아보며 상실한 그 누군가를 다시 떠올렸을 때 슬픔은 언제나 그대로 거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고유성에 대한 상실은 어쩌면 결코 치유되는 것이 아닌, 충분한 애도로써 슬픔을 돌아보는 간격을 늘이는 것, 또는 ‘무뎌짐’이라는 단어 속에 감정을 담아 실어 보내는 것일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고유한 것에 대한 상실로써 발생하게 된 애도에 대해 한강 작가의 말을 인용하여 덧붙여 본다.
“산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애도는 무엇일까. 어쩌면 애도는 죽은 자를 온전히 보내는 것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구원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