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호] 희망의 잔상, 저마다의 궤도를 그리며

커버스토리

by 성균지

수습편집위원 이은서




1. 사라져가는 문화의 잔상


“매년 전수 교육을 하지만 본격적으로 탕건을 배우겠다는 수강생들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5, 6년에 탕건 1개가 팔릴까 말까 할 정도로 수요가 적으니, 강요도 할 수 없고 안타까울 노릇이에요.”


국가무형문화유산 탕건장 김혜정(73) 선생의 말에서 깊은 절망감이 묻어났다. 천년을 이어온 기술이 한 사람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형문화유산이 남긴 ‘잔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잔상(殘像)이란 ‘자극이 사라진 후에도 감각기관에 남아있는 상(像)’을 의미한다. 무형문화유산은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현재의 삶을 구성하는 보이지 않는 토대이다. 예를 들어, 명절 때 온 가족이 모여 떡국을 끓이고 송편을 빚는 행위는 수천 년간 이어져 온 공동체 의식과 시간관념의 표현이다. 무형문화유산은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 전체의 결속력을 형성하는 역할을 해왔다. 마을 단위로 행해지던 농악이나 탈춤은 계층을 뛰어넘는 공동체 의식을 만들어냈고, 장인 정신은 현대 사회의 장인 문화와 품질 철학의 바탕이 되었다. 특히 세계화 시대에 무형문화유산은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잔상들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 2023년에 발표된 국가유산청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142개의 국가무형문화유산 중 약 30%가 전승자 부족으로 인해 존폐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전통적인 생활양식이 급격히 변화했고, 젊은 세대들은 전통문화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2021년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전국 성인 남녀 2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통문화 진흥을 위한 정책 기초연구 조사’에 따르면 20대와 30대 중 ‘전통문화 향유 경험이 없다’라고 답한 비율은 각각 13.8%와 9.2%로 나타났다. 전통문화를 향유하지 못하는 이유로는 ‘관심·흥미가 없어서’라는 답변(20대 27.8%, 30대 24.3%)이 가장 많았다.


한편, 우리 사회 곳곳에는 무형문화유산이 남긴 깊은 흔적들이 스며들어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 절기에 따른 생활 리듬, 음식을 대하는 태도, 심지어 현대 디자인 속에서도 전통의 잔상을 발견할 수 있다. 현대의 건축가들은 빛과 바람이 드나드는 길을 만들고, 사람과 공간을 조화롭게 잇는 한옥의 처마선이 지닌 지혜를 도시 한복판에서 재현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서울시청 신청사이다. 이 건물은 전면 유리벽 뒤에 물결치는 듯한 곡선형 지붕을 얹어 한옥 처마의 유려한 라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과거의 미학이 오늘날까지도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2. 잔상을 마주하다


개성주악이 말하는 문화의 지속성

세시음식은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살아온 조상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철학이다. 계절에 따라 생산되는 식품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즐기는 풍속, 그것이 바로 세시음식이다. 대표적인 세시음식으로는 설날에 먹는 명절음식 떡국, 삼복에 먹는 시절음식 삼계탕이 그 예시이다.

젊은 세대와 멀어져가는 전통문화의 현실은 세시음식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절기에 따라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먹던 관습은 오늘날 점점 우리의 삶에서 멀어지고 있다. 세시음식은 절기와 명절마다 자연의 흐름에 맞춰 준비하던 전통 음식으로, 계절의 변화를 몸과 입으로 느끼게 하는 생활 문화였다. 그러나 농촌에서 마을 공동체와 함께 준비하던 세시음식은 도시 생활로의 전환과 함께 준비 여건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아파트와 같은 집단 거주 환경은 대규모 조리나 이웃 공동체의 세시풍속을 이어가기 어렵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세시음식 문화의 뿌리는 농업 중심의 계절 주기와 맞물려 있었기에, 산업과 서비스업 중심으로 변화한 사회 구조에서 그 의미가 약화되었다. 농업 비중이 줄어들고 도시 생활이 보편화되면서 절기와 수확에 맞춘 전통 행사 자체가 줄어들었고 세시 음식 역시 그 흐름 속에서 잊혀지고 있다. 세시음식이 일상에서 자연스럽에 이어지기 힘든 구조가 된 것이다.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얇은 껍질을 만들고 팥가루에 꿀을 넣고 볶아서 소로 하여 싸서 기름에 튀긴다. (중략) 가장 귀한 손님의 접대나 제수에 반드시 올린다. 떡 중에서 으뜸이다.”

-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두 끝이 뾰족하기 때문에 조각 糙角이라 한다. 이것은 제사에나 손님 대접할 때 떡 위에 놓는 것을 가장 숭상한다.”

-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최근 몇 년 사이, 세시음식 중 하나인 ‘개성주악’이 SNS를 중심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개성주악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이른바 ‘할매니얼’ 디저트로 재조명되었지만, 정작 그 유래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찹쌀 반죽을 튀겨낸 뒤 조청이나 꿀에 버무리는 전통 간식인 주악은 본래 동양의 발렌타인이라고도 불리는 칠석날에 먹던 의례 음식이다. 전통적인 맥락은 희미해졌지만, 독특한 형태와 식감, 비주얼이 부각되며 젊은 층의 관심을 다시 끌고 있다. 개성주악은 개성에서 즐겨 먹던 주악의 한 종류로, 이를 약과나 우메기 등과 함께 폐백 음식이나 이바지 음식으로 쓰였다.

지난 7월, 서울 종로구 돈의문박물관마을이 ‘개성주악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주최했다. 참가자들은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며 반죽을 손수 빚고 기름에 튀겨 완성했다. 단순한 체험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전통 음식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명절 음식이나 세시풍속에 담긴 상징성이 많이 퇴색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트렌드는 흥미롭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음식의 형태와 레시피가 빠르게 공유되면서 과거의 음식이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특히 주악은 간편한 재료, 독특한 외형, 고소하고 쫀득한 식감 등으로 인해 각광받고 있다. 사라졌던 전통이 새로운 매체를 통해 다시 소환되고 있는 것이다. 단절된 것이 아니라, 기억의 형태로 남아 있던 문화가 현대의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전통문화의 지속 가능성과 복원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한다.

함께 체험한 ‘주바오’ 양의 후기: 개성주악에 대한 간단한 소개 이후 체험이 바로 진행되었다. 많지 않은 인원으로 진행되었고 강사분께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자세히 알려주셨다. 과정이 어렵지 않아 빠르고 쉽게 만들 수 있었다. 마지막에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미숫가루도 주셨다.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체험을 한 것 같다.


전통 자개, MZ 감성 실갈피로 재해석되다

자개는 나전칠기의 장식 문양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개껍데기 겉면을 갈아내어 얇게 가공한 공예재료이다. 자개의 사용은 통일신라시대 유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전칠기는 전통 공예의 품격과 예술성을 기반으로 다양한 확장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최근 전통 공예의 현대적 재해석이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서울 종로구의 공방 ‘프리즘펄 자개맨숀’에서 ‘자개 실갈피 만들기’ 체험이 열렸다. 실용성과 감성을 모두 갖춘 이 프로그램은 전통 자개 기법을 현대적인 문구 소품에 접목해 보는 시도로 기획되었다. 체험은 조용하고 깔끔한 공방 공간에서 소규모로 진행되며, 참가자들은 다양한 실색, 자개 조각, 장식 재료 등을 활용해 책갈피의 일종인 실갈피를 직접 꾸민다. 전통 나전칠기 문양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자개 비즈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공방 측에서 제작한 예시작들이 전시되어 있어, 초보자도 무리 없이 자신만의 디자인을 완성할 수 있다.

다만 체험 특성상 실제 자개를 염색하는 과정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정통 나전칠기 기법과의 연관성은 제한적이며, 오히려 자개의 시각적 요소를 디자인 소재로 활용한 측면이 강하다. 보다 전통적인 제작 과정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공방에서 운영 중인 별도 프로그램 ‘자개 키링 만들기’를 선택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는 간단한 연마와 조립을 통해 자개 공예를 조금 더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전통 공예의 기술을 현재의 디자인 감각과 결합하는 시도는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전통적인 미감이 2025년의 실용 소품 디자인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자개 실갈피 만들기와 같은 프로그램은 전통이 보존을 넘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 농후한 문화 자산임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함께 체험한 ‘이바오’ 양의 후기: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 공방은 처음 가보았는데 무언가를 직접 만든다는 게 재밌었다! 다만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해야하다보니 ‘내가 참 결정을 못하는구나…’ 깨달았다... 결국에는 다시 풀고 묶고 하느라 시간이 많이 오바되었지만ㅎㅎ 결과물은 아주 예뻐서 만족이다!!!



3. MZ세대가 무형문화유산을 만날 때


요즘 MZ세대들 사이에서는 핸드메이드가 열풍이다. SNS를 보다 보면 ‘#도예클래스’, ‘#반지공방’, ‘#뜨개스타그램’ 같은 해시태그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과로한 디지털 세상에서 벗어나 아날로그로 회귀하는 활동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그리고 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걸까? 여기에는 한국 MZ세대만의 특별한 배경이 있다.


먼저 번아웃이 일상화되었다. ‘항상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SNS에서 끊임없이 비교당하는 피로감, 24시간 알림이 울리는 연결된 삶. 잡코리아가 2024년 남녀 직장인 34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중 69%가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도한 업무량 뿐만 아니라 성과주의적 분위기, 경쟁을 부추기는 문화가 번아웃을 가속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MZ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과 함께 자랐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먼저 디지털 독성을 체감하고 있다. 불과 20년 만에 PC에서 스마트폰 시대로 넘어오며 압축적 디지털 전환이 발생하였고, '빨리빨리' 문화가 로켓배송과 실시간 소통과 결합하면서 극한의 속도감을 요구받게 되었다. 여기에 입시부터 취업, 외모까지 모든 것을 비교하는 극한 경쟁 사회가 SNS와 만나면서 24시간 타인과 비교당하는 피로감은 배가 되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폰 중독률과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디지털 라이프는 부작용을 더욱 빠르게 촉진시켰다. 좁은 국토와 고밀도 도시화로 인한 물리적 공간의 제약까지 더해져, MZ세대는 더 빠르고 강하게 디지털 피로를 경험하고 있다.


한편, 무형문화유산은 이러한 지속불가능한 현재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MZ세대가 추구하는 슬로우 라이프와 무형문화유산이 품고 있는 느린 시간의 철학은 서로 닮은 면이 있다. ‘빨리빨리’에서 ‘천천히, 제대로’로 바뀐 시간 인식, 완벽한 SNS 피드에 지쳐 추구하게 된 불완전함의 아름다움, 검색으로는 찾을 수 없는 직접 체득해야하는 지식에 대한 갈망. 무형문화유산이 수백 년간 품어온 정성이라는 느린 철학과 손의 미묘한 떨림이 만드는 개성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환경을 생각하는 MZ세대의 지속가능성 추구와 자연 재료로 대대로 전해온 무형문화유산의 지속성도 맞닿아 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 챙김을 실천하려는 젊은 세대에게 전통 기예의 집중과 몰입은 또 다른 형태의 명상이 되고 있다.


전승자 부족으로 희미해져 가던 무형문화유산의 잔상과, 번아웃으로 지친 젊은 세대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다. 사라져가는 전통은 새로운 전승자를, 디지털에 지친 청년들은 아날로그적 치유를 갈망한다. 무형문화유산은 새로운 빛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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