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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균지 Sep 11. 2024

[111호] 국경을 횡단하며,디아스포라의 삶에 접속하기

인간이 만든 경계 가운데 국경선만큼이나 견고한 것이 또 있을까. 국가와 국가 사이 그어진 선 위를 넘나들며 단절과 확장을 겪는 존재들을 우리는 '디아스포라(diaspora)' 혹은 ‘이산자’라 칭한다. ‘파종’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디아스포라는 본래 살던 땅을 떠나와 특정 지역에 정착하게 된 민족의 구성원이나 그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그 어원은 타국의 점령으로 팔레스타인을 떠나 뿔뿔이 흩어지게 된 유대 민족의 사례에서 출발했으나, 오늘날에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여러 민족, 집단까지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디아스포라, 넘나드는 역사의 흔적

이주와 정주를 가르는 갈림길의 등장은 우연적이기도, 필연적이기도 하지만 그 중심에는 늘 ‘생존’이 있다. 대규모 전쟁과 학살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해, 사회경제적 혼란 속 먹고 살 수 있는 터전을 찾아, 익숙했던 공간과 공동체를 두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청나라 말기의 환란으로 인해 미국 서부 일대로 대거 이주한 중국 한족들,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의 대학살을 피해 흩어진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리고 전 지구적 디아스포라의 역사에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선인, 다른 말로 ‘한인 디아스포라’로 불리는 이들이다. 재외동포청의 2023년 통계에 따르면, 오늘날 약 708만 명의 재외 동포[1]가 193개국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이는 내국인 수의 14% 수준에 달하며, 화교 사회가 3700만, 유대계 인구가 58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유의미한 규모다. 한인 디아스포라의 분포와 규모는 일제의 침탈과 남북 분단, 나아가 해방 이후 위태로운 현대사를 거친 한반도의 역사를 품은 상흔이기도 하다.

국가기록원이 정리한 재외 한인의 역사에 따르면, 한인 디아스포라는 그 짧은 역사에 비해 다양한 국가로 흩어져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1860-1910년대, 구한말의 민중은 거듭되는 기근과 빈곤에서 도망쳐 중국과 러시아 지역의 대륙을 향해 국경을 넘었다. 1903년에는 7,266명의 대한제국 노동자가 미국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했다. 정부의 보호 아래 이루어진 한반도 최초의 노동 이민이었다. 이어 1924년까지 약20년간 1천여 명의 한인 여성이 이주해 간 한인 노동자들과의 결혼을 목적으로 하와이를 찾아 이민 가정을 꾸렸다. 

1910-1945년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며 만주와 일본 지역의 한인 인구가 급증했다. 토지와 생산수단을 빼앗겨 쫓겨나다시피 이주한 농민과 노동자, 일제의 만주사변과 만주국 건설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한 이들과 정치 활동을 위해 자리 잡은 독립운동가. 1930년대 후반까지 약 50만 명의 한인은 각자의 사연을 지니고 만주의 땅을 밟았다. 일제에 의해 수많은 조선인들이 광산과 전쟁터로 끌려갔으며, 일자리를 찾아 자발적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해방이 찾아왔을 때, 당시 일본 열도에 거주하는 한인은 약 230만 명에 달했고 각기의 사유로 60만 명의 인구가 일본에 남았다. 

1945-1962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50년부터 64년까지 미군과 혼인한 6천여 명의 여성과 5천여 명의 입양아가 대서양의 망망대해를 건너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했다. 마침내 1962년, 한국은 정착을 목적으로 한 이민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103명의 농업 종사자가 브라질로 이주한 것을 시초로, 점차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와 화이트칼라직 중산층까지 미국과 캐나다로의 이주에 동참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급속한 성장과 세계화의 빠른 진행이 맞물려, 한반도를 오가는 발걸음은 이제 다음 국면을 맞이했다.

각기 다른 연유로 생겨난 한인 디아스포라에게는 이주한 지역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에 따라 저마다 다른 이름이 붙여졌다. 소련에 거주하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일대로 흩어진 한인의 명칭은 ‘고려인’이 되었다. 만주 거주민 중 해방 이후에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들은 중국 소수민족으로 인정받아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일제강점기에 생계 목적 및 강제 징용으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향한 재일 조선인과 한국인은 ‘자이니치’로 남아 있다. ‘대한민국 나성시’라는 별명이 붙은 LA 한인타운, 일제 시기 군수공장이 밀집해 있었기에 조선인 공장 노동자들의 터로 이어져 온 오사카 이카이노 등 재외 한인들의 이름난 거주지들도 수두룩하다. 한인 디아스포라의 상위 분포국은 미국과 중국, 일본이며, 오늘날 전 세계 195개국 중 두 나라를 제외하고는 국경과 국경 사이 우리 땅에서 퍼져나간 사람들이 속속들이 들어차 있다.

한반도를 떠나 온 세계로 퍼져나간 사람들의 흐름만큼이나 타국에서 대한민국을 향하는 이들의 물결 역시 거대하다. 이제 대한민국은 체류 외국인 300만 명 시대를 맞고 있다. 법무부의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국내 거주 장단기 체류외국인 수는 250만7584명으로 전체 인구의 4.89%에 달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상 한 나라의 외국인 비율이 5%를 넘는 경우 다문화사회로 구분되니, 우리나라는 사실상 국제적 기준의 다문화 국가에 진입하고 있다. 이에 국내 체류 외국인 숫자가 100만 명을 돌파해 전체 인구의 2%를 넘어선 2007년, 법무부는 매년 5월 20일을 ‘세계인의 날’로 공식 기념일로 지정했다. 같은 해 국제연합(UN)이 대한민국을 이민 유입이 송출보다 더 큰 ‘수민국가’로 분류하기도 했다. 근현대의 혼란기 속 수많은 이민자를 떠나보내던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마침내 송출보다 유입의 규모가 큰 나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접속, 그가 사는 방식

사과와 배를 접붙여 만든 연변 사과배. 사과배는 중국과 한국 사이에 낀 연변 조선족의 정체성을 빗대는 말로 자주 사용되어 왔다. 본디 자란 곳에서 떼어져 나와 접붙여진 디아스포라의 삶은 그 자체로 이방인이자 소수자의 삶이다. 고립되고 뿌리내리고 결합하려 애써온 이들의 생은, 온통 정상성과 전형성에 불화하며 난 생채기로 가득하다. 재일조선인(자이니치) 2세로 태어나, 추방당한 이산자로서의 예민한 시선을 온 평생에 걸쳐 저술 활동으로 풀어낸 서경식 선생은 말한다.

디아스포라가 고난을 당한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 그들이 국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꾸로 말하면, 국가 없는 세계에 대한 희망(감히 ‘희망’이라 말해두자)을 잉태할 보편적 사상이 그들로부터 펼쳐질 수 있다는 뜻도 된다.
 - 『디아스포라 기행』 개정판, 「개정판을 펴내며」 중에서

‘국가’란 결국 근대의 산실이다. 시대의 흐름 속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발상임에도, 둘러싼 벽이 높고 단단해 보이는 탓에 우리는 종종 국가라는 관념을 완고한 실체로 오해한다. 언어공동체란, 민족이란, 그리고 국민이란, 영영 결코 횡단할 수 없는 개념일까? 공고히 자리 잡은 상식에 가로막힌 채 우리는 어떤 공존의 가능성을 놓치고 있을까. 실존하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포착하고 상상할 때, 비로소 찾아낼 수 있는 존재-방식과 자정의 기회가 있다. 그 실마리를 찾아 어슬렁거리다, 한 대학생 이주자의 삶에 닿았다. 시선을 비춘 곳에는 구체적으로 뻗어 나온 어떤 이야기가 있었다.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중국어를 전공 중인 김산옥 씨의 삶은, 그 기원부터 현재까지 이주의 흔적이 가득하다. 8년 전 겨울, 열일곱 살의 나이에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그다. 중국에 살던 시절에는 조선족이라 불렸다. 중국 내에 거주하는 한국계 소수 민족을 칭하는 말이 ‘조선족’이니, 한국에 살고 있는 그는 이제 조선족 ‘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김 씨는 한국어와 중국어에 모두 능통하다. 김 씨와 마찬가지로 조선족이었던 가족들이 그가 나고 자랄 때부터 한국어 공부에 각별히 신경을 기울였던 터다. 덕분에 더 넓은 범위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같은 사건을 보도한 기사라도 중국어로 된 것과 한국어로 된 것을 모두 읽어낼 수 있었다. 어떤 국가이든 특정 주제에 대한 그 국가만의 관점이 있기 마련이다. 두 나라의 언어를 모두 사용함으로써 양측의 문화, 나아가 양측의 관점을 살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이런 그가 가진 시선은 단지 한 나라의 입장만을 반영하지 않는다. 흑이나 백이 아닌, 경계에서 자라난 시선이다.

그러나 한국에 정착해 고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했을 때, 그가 마주한 세간의 인식은 얄팍하다 못해 폭력적이었다. 수업 시간에 중국과 관련한 주제가 언급되면, 학급 친구들이 저마다 호기심을 앞세워 김 씨에게 난감한 질문을 던졌다. “너는 중국이 좋아, 한국이 좋아?”, “너는 중국 축구를 응원해, 한국 축구를 응원해?”, 간혹 이런 질문도 있었다. “너는 중국과 대만 사이를 어떻게 생각해?” 그의 국적과 정체성, 나아가 사상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증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질문들에 기분이 상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김 씨를 더욱 괴롭혔던 것은 그 질문들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남겨진 스스로에 대한 의문, 혼란스러움과 외로움이었다. 

"오랫동안 혼자라고 느꼈어요. 어느 나라 사람도 아니고, 그냥 외톨이였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 대부분을 중국에서 보냈다. 국경을 넘었다고 해서 곧바로 자신이 한국인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확신하는 것도 아니다. 중국에서 오랜 생활을 했지만, 특별히 생각날 만큼 행복했던 기억은 없다. 한국으로의 이민은 단순히 거주하는 나라를 바꾼 사건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지낸 만큼 익숙하지만,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힘들 정도로 괴로워했던 기억이 있는 곳이 중국이다. 스스로를 괴롭혔던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져,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탈출구로 한국을 택했다. 한국으로의 이민은 김산옥 씨 인생의 전환점이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빨리 정착할 수 있었어요. 친척분들과 부모님이 모두 한국에 계셨기에, 한국을 향한 건 제게 당연한 선택이었죠. 고모 두 분께서 1990년대에 한국으로 처음 건너오셨어요. 당시 중국의 경제 상황이 정말 어려웠고, 더 큰 벌이가 필요해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으로의 이민을 결정하셨던 거예요. 저희 세대와 달리, 고모 세대에는 인신매매가 잦아 이민하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선택이었어요. 한국에 안전하게 도착한 뒤에도 한국인이 기피하는 고된 일부터 시작하셨죠. 고깃집 불판 닦는 일 같은 것부터요.”

한국에 건너온 고모들은 10년간 식당에서 일하며 돈을 모아 이들만의 식당을 차렸다. 김 씨의 가족들 중 가장 처음으로 한국 정착에 성공했고, 식당은 지금까지도 운영 중이다. 한국으로 앞장서 발걸음을 내디뎠던 그들은 김산옥 씨 부모님의 한국 정착을 도왔고, 부모님의 정착 이후 3년쯤 지난 시점에 김 씨도 한국행을 택하게 된다.

김산옥 씨의 삶은 역사적 움직임과 연결되어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래로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한국 사회는 이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이주해 온 조선족들은 한국 사회에서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중국 땅에서는 한국의, 더 엄밀해지자면 조선의 문화를 간직해 온 소수민족으로 살아왔지만, 한국으로 넘어와서는 반대로 중국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돌아온 조선 땅에서도, 조선족이라는 출신은 꼬리표가 된다.

“이제는 제 과거 이야기를 잘 안 꺼내게 돼요. 중국에서 오래 살다 왔다는 사실 말이에요.”

중국에서 오래 살다 온 자신에 대해 한국인이 반감을 드러낼 수 있다는 여지를 이제는 받아들인다는 김 씨의 말에는, 수없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담담함과 체념이 함께 묻어 있다. 한국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정한 이상 겪을 수밖에 없는 과정임을 인정한다고 그는 말한다. 단순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받고 살아가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다치지 않기 위해 그가 택하게 된 방안은 중국에서의 과거를 언급하지 않는 일이다. 간혹 김 씨와 같이 중국에서 이주해 온 이를 만나기도 하지만, 각자가 겪는 어려움을 깊게 공유해본 적은 없다. 자신과 유사한 경험을 찾아보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이 김산옥 씨의 설명이다.

“정체성이 없었어요. 그냥 어느 쪽도 선택하고 싶지 않았어요. 스스로의 뿌리도 모르겠고 어느 한 쪽에 소속감도 없다 보니까, 반드시 하나의 나라를 제 정체성으로 삼고 싶지 않았나 봐요.”

정체성이 없는 것이 그의 정체성이다. 김 씨는 2021년 8월 한국인 주민등록증을 받았으며 자기 자신의 의사로 한국을 선택한, 반박의 여지 없는 한국인이다. 한편 그렇다고 해서 그가 중국에서의 기억을 모두 지울 수는 없는 일이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저는 제가 가진 모든 요소를 끌어안고 살아갈 생각이에요.” 

김산옥 씨는 최근 논문을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중국 도자기를 주제로 한 중국 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도자기를 제작하는 원료와 관련 실험에 관해 서술된 논문이었고, 그 내용에는 중국의 지역 민간 신앙과 고전 문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녹아들어 있었다. 단순히 중국어를 잘 하기만 했다면 절대 수행하지 못했을 일이었다고 김 씨는 강조한다.

김 씨는 현재 대학교 4학년이다. 그동안 그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옷을 수입해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해 본 적도 있고, 중국어 통역 아르바이트도 꾸준히 해 왔다. 첫 논문 번역 경험이 더 많은 기회로 이어져 중국어 논문을 번역하는 일도 수차례 맡았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직접 번 돈은 교환학생을 다녀오는 데 쓰였다. 스스로 획득한 교환학생 신분으로 다시금 중국 땅을 밟았다.

“저는 제가 욕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중국어 교육이나 무역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김산옥 씨. 그는 이제 대학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스스로 세운 계획 안에 갇히기보다는 변수에 끊임없이 적응하며 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적응하고 또 적응하며 살아온 일생을 지나와 어느새, 전이와 변동은 그가 사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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