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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균지 Sep 11. 2024

[111호] 예고된 죽음; 교제폭력

처음 이 기사를 기획하게 된 건 정말 순전히 두려움과 궁금증이었다. 


‘교제폭력’.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라고 생각해 왔다.  

친구의 아는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그것도 전 남자친구에게 맞아서. 나이는 나와 같았다.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어안이 벙벙했다. 동갑의 평범한 여자애가 죽었다니. 그 소식을 듣고 하루 이틀쯤 지났을 때 뉴스가 나왔다.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그 사람이 어쩌면 내 친구들 중 누군가가 되었을지도, 또 어쩌면 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먼저 몰려왔고, ‘동시에 왜 그가 전 남자친구라는 사람에게 맞아 죽기에 이르러야 했을까? 법은? 경찰은? 다 어디에 있던 걸까?’ 수많은 궁금증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나는 기사를 쓰기로 했다. 두려움과 궁금증의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고 싶었다. 

2023년 한 해 동안 남편 또는 연인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최소 138명, 살인 미수 등 위기에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311명이다. 올해 1월부터 4달간 교제폭력으로 붙잡힌 가해자 수는 4천4백 명이었고 그중 1.9%만이 구속되었다. 5년간 교제 살인 피해자는 57% 증가했다. 친밀한 관계 내 남성들의 폭력에 놓인 여성들을 구출할 수 있는 공권력은 없었다. 가해자들을 처벌할 법도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죽음의 위기에서 탈출해야 했거나 또는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

2024년 4월 1일 경남 거제에서 남성이 전 여자친구의 집에 무단 침입하고 그녀를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이미 열한 번에 걸친 경찰 신고가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고 사람들은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꼈다. 피해자가 수차례 경찰에 신고했을 때 한 번이라도 제대로 대처했다면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왜 앞선 수많은 신고에도 그녀의 사망을 막을 수 없었던 걸까?우리는 각각 법과 현장에서의 전문가를 찾았다. 먼저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관은 교제폭력 입법과제에 대한 현안 분석을 진행해 왔으며, 여러 토론회와 매체 등 다양한 방면에서 여성 폭력에 관해 실질적인 방안 마련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어 송란희 대표는 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상담과 쉼터를 제공하고 있는 ‘한국여성의전화’의 상임대표로서 여성 인권 활동을 해오고 있다. 두 전문가의 교제폭력에 대한 더 현실적이고 깊이 있는 시선을 통해 이에 대응하는 현재 우리 사회의 실상이 어떠한지 알아보았다. 


그들의 죽음을 막을 방법은 정말 없었을까

여자들이 죽어 나갈 때마다 경찰은 매뉴얼의 부재를 이유 삼았고, 사법기관은 법의 부재를 변명 삼았다. 이에 국회는 재빠르게 여론의 비위를 맞춰 법을 개정해 버렸고, 정부는 그럼에도 개인의 일탈로 치부할 뿐 성차별의 구조적 문제는 외면하기에 급급했다. 정작 친밀한, 또는 친밀했던 남성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의 소리로 내뱉지 못한 외침을 들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책임을 떠넘기며 ‘어쩔 수 없었다’라고 난색을 표하기 바빴다.

피해자의 신고를 가장 먼저 접수하는 수사기관은 현재 교제폭력을 포함하고 있는 법이 없어 ‘스토킹 처벌법’과 ‘가정폭력처벌법’을 적용하고 있기에 제대로 피해자를 보호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스토킹이 수반되지 않은 교제폭력은 피해자에게 사전적인 안전 조치를 제공할 매뉴얼이 없고, 가정폭력처벌법 또한 교제 관계까지 포함하지는 않기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결함과 문제에 앞서, 이제까지 사망에 이른 피해 여성들이 무방비하게 폭력에 노출되어야 했던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Q : 교제폭력으로 사망하는 피해자들이 발생할 때마다 ‘교제폭력이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어 어쩔 수 없었다’라는 의견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송란희 대표(이하 송) : 교제 폭력은 과거엔 없었던 일이 최근 새로 생겨난 게 아니라 계속 있었던 일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관련해서 아예 처벌을 못해왔던 건 아니겠죠. 사실 법이 없어서 피해자를 구하지 못했고 가해자를 처벌 못했다고 하는 것은 수사기관의 핑계로 느껴집니다. 물론 법을 개정해야 할 필요성은 있지만, 저는 피해자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것은 법의 문제보다는 인식의 문제가 훨씬 크다고 생각해요. 이 나라에 헌법도 있고 형법도 있는데, 찾아서 적용해 주려면 다 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법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가 의지의 문제인 거죠. 
꼭 교제 폭력이나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법이 아니더라도 성폭력이 발생했다면 (교제폭력이나 가정폭력의 경우 많은 경우 성폭력 피해를 동반하고 있기에) ‘특정범죄신고자 등 보호법’이 마련되어 있어 보복당할 위험이 있는 피해자들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연인관계, 가족관계라고 하면 더 꼼꼼히 살펴보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아, 그래?’하고 오히려 손을 놓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데이트 폭력 같은 경우는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일어나면서 범죄 사이즈가 커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보복의 위험이 크고 재범 가능성이 높아요. 특정범죄 등 신고자 보호법을 적용해 신변 보호 등의 조치로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을 텐데, 현 수사기관은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해주지 않습니다.

경찰과 수사기관의 법 부재에 기댄 변명이 사실상 직무유기에 더 가깝다는 문제 제기는 끊임없이 존재해 왔다. 그들의 의지가 있었다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을 사건들도 있었을 것이다. 허민숙 연구관 또한 공권력의 적극적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사회적 인식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었다.


Q: 국가는 대체 왜 피해자들의 지속적인 신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망에 이를 때까지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했던 걸까요? 

허민숙 연구관(이하 허) : 가정폭력을 경미하게 생각했던 오래된 관행의 여파입니다. 가정폭력조차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데, 혼인에 이르지도 않은 교제 관계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리 없죠. 여성이 압도적인 피해자가 되는 범죄에 개입하지 않는 것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적 관계 속 여성에 대한 권한을 상대 남성이 가지고 있다고 보는 대한민국의 가부장적 인식에서 기인한 태도인 거죠. 

문제는 수사기관에 국한되지 않는다. 의지가 있었다면 피해자 구제가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사실이, 현행법에 아무 문제나 결함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입법과 사법 영역에서 피해자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법을 만들고 집행해 왔기에 문제는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러한 문제점을 가장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가정폭력처벌법의 큰 패착인 ‘반의사불벌죄’다.  


반의사불벌죄는 피해자들을 어떻게 옥죄나

스토킹처벌법과 가정폭력처벌법은 현재 교제폭력 처벌을 위해 대체로 적용되는 법이다. 이중 가정폭력처벌법에는 반의사불벌죄가 적용되는데, 이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형사처벌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제도이다.[1] 20여 년 전 처음 제정된 가정폭력처벌법에 반의사불벌죄가 도입된 것은 당시 여성들이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이 가족일 경우 심리적 관계, 경제적 관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신고 자체가 어려웠던 상황 때문이다. 그러나 법이 시행된 이후 오히려 이 요소가 여성들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반의사불벌죄가 여성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현장에서 지켜봐 온 송 대표는 ‘친밀하다’라는 관계의 특수성에 집중해서 설명했다.

송 : 반의사불벌죄의 적용은 사실상 처벌에 대한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것이기에 피해자를 더욱 부담스럽게 하죠. 친밀한 관계에서는 상대가 나에게 지금 왜 이러는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꾸 이해하려고 하죠. 사이좋게 지내고, 서로 돌봐주기로 약속했던 여러 서사 때문에 이 폭력 행위조차도 피해자에게는 ‘우리가’, 그러니까 친밀한 사이였던 가해자와 함께 넘어서야 할 과제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 때문에 초기 단계에서는 피해자이더라도 자신을 피해자라 자각하지 못하기도 하죠. 그러다가 점차 폭력이 너무 심해지니까 신고하게 되는 거예요. 단 한 번 그랬다고 해서 사람들이 데이트 폭력으로 신고하지 않아요. 가정 폭력도 그렇고요. 

그때 가서 피해자에게 “처벌하시겠어요?”라고 물어보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죠. 앞서 말했던 심리적 관계성 때문에도 그렇지만, 또 한 가지는 보복 위험이 굉장히 크다는 이유도 있어요. 가해자 입장에서는 피해자가 처벌 불원만 하면 내가 처벌받지 않을 수 있으니까, 피해자가 빨리 처벌 불원서를 쓰게끔 더 괴롭히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현재는 피해자들이 내가 처벌 불원서 안 쓰면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하니까 써주게 되는 상황이 벌어져요.

입법조사관으로서 법의 허점을 바라본 허민숙 조사관의 의견 또한 단호했다. 

허 : 반의사 불벌 적용이 친밀한 관계 폭력 피해자를 어떻게 취약하게 만드는지를 주의 깊게 살피고, 결과적으로는 전격 폐지해야 해요. 저지른 범죄행위를 단죄하고 피해자가 추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 집중해야 하고, 피해자가 용서하였는지,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지는 가해자 처벌을 결정하는 데 있어 고려할 만한 사항이 아닙니다. 더더구나그 대상이 친밀한 관계인 배우자, 파트너, 교제 관계일 때에는 피해자의 취약성과 위험이 증폭된다는 점에서 가정폭력처벌법과 향후 교제폭력 관련 입법에서도 처벌 불원 적용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법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현행법에서 반의사불벌죄의 폐지는 두 전문가 모두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받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다시 폭력에 노출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의사불벌죄 폐지가 교제폭력에 온전히 대처할 수 있도록 법을 완성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법률 체계의 또 다른 문제는 기본적으로 교제폭력을 포함한 법이 없다는 것이다. 


Q: 현존하는 법률 안에서도 피해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인식이 있다면 충분히 사전에 조치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럼에도 교제폭력을 다룰 수 있는 법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송 : 피해자의 보호받을 권리를 강화하기 위해서 꼭 필요해요. 수사기관의 인식 변화가 가장 일차적인 문제이긴 하나 당연히 법이 있으면 훨씬 쉽고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겠죠. 먼저 법을 살펴보자면 우리나라 여성 폭력에 관련된 법률들은 각각 두 개로 나누어지거든요. 하나는 가해자 처벌에 관한 법이고 다른 하나는 피해자 보호와 예방에 관한 법으로 나뉘어져 있어요.[2] 이 중 피해자 보호법에 의하면 피해자들이 상담 기관이나 보호시설, 의료비 지원 등을 받을 수 있거든요. 가정폭력처벌법이나 스토킹처벌법은 법원의 결정이 있기 전에도 접근 금지 조치나 전자장치 부착 같은 실질적인 보호를 빨리 임시적으로 할 수 있게 해줘요. 그런데 지금 데이트 폭력 피해자들은 따로 법이 없으니까 그런 면에서 공백이 있다는 거죠. 

앞서 말했던 스토킹처벌법과 가정폭력처벌법은 가족 관계가 아닌 이상 스토킹이 수반된 폭력이거나 사실혼 수준의 교제 관계일 경우에만 적용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교제폭력의 법적 처리 방안은 반드시 마련될 필요가 있다. 한데 실질적으로 어떤 방안을 마련해야 할까. 현재 그 방법에 있어 교제폭력을 별도로 다룰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방안과 친밀한 관계 모두를 포괄할 수 있도록 기존의 가정폭력 관련법의 범위를 개정하는 방안,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법과 현장에서 각각 바라보았을 때 여성들이 제대로 보호받기 위해서 어떤 방식을 택해야 할지 두 전문가에게 물었다. 


Q: 교제폭력을 따로 규정하는 법 제정과 친밀한 관계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법 개정 중 어떤 방안이 현실적으로 피해자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허 : 해외 입법례를 보더라도 교제 관계에 관한 특별법이나 별도법을 만든 국가는 없어요. 우리도 기존 법을 손질해서 친밀한 관계의 폭력, 교제 관계에 있는 어떤 자를 포함시키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이 형편없으니 이 참에 다 전면 개정하자는 겁니다. 처벌 불원과 상담 조건부 기소 유예 등 독소조항[3]을 걷어내 제대로 된 법을 만들고, 교제폭력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범위를 넓혀야겠죠. 무엇보다 여성이 무슨 범죄를 겪을 때마다 별도 법을 만들 거냐고요? 사실 가정폭력처벌법, 스토킹법 등이 별도법으로 나열돼 있는 것도 여성에 대한 폭력을 사회가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에요.
( 2024.07.23 경향신문 인터뷰 중 발췌)[4]


Q : 교제폭력에 대한 별도 법 제정이 젠더 폭력의 걸림돌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허 : 스토킹, 가정폭력, 성폭력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여러 가지 폭력은 서로 얽혀있는 경우가 많고[5] 범죄의 동기가 사적관계에 있는 여성을 자신의 소유물, 정복 및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가치관에서 비롯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법적 대응은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을 행위별로 구분하면서 공통의 발생 원인을 찾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죠. 젠더 기반 폭력은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와 인식, 그를 반영한 법 위의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점에서부터 시작해야 비로소 문제 해결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송 대표는 친밀한 관계 모두를 포괄하는 법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시의성과 적절성 사이를 고려했을 때 쉽게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답했다. 

송 : 현실적으로 단기적인 성과와 장기적인 성과를 분리해서 생각해 보았을 때 노선이 달라지는 것 같거든요. 지금 가정폭력처벌법의 목적 조항은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사법기관에서도 그런 인식이 지배적이다 보니 사실상 가해자에 대한 형사 처벌이 너무나 적게 이루어지고 실질적인 피해자 구제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폭력처벌법에서 그런 목적 조항을 삭제하고 형사처벌로 일원화하는 개정과 더불어 이 법이 다루는 관계를 확장해서 데이트 관계까지 포함하도록 하고 싶은 게 저와 저희 단체의 생각이에요. 실제로 많은 해외 국가에서는 이렇게 하고 있거든요. 

Q : 장기적으로 바라보았을 때는 현재 가정폭력 방지법 자체를 전면 개정하고, 대상을 친밀관계로 모두 포괄하는 게 맞다는 말씀인 거죠? 그렇다면 단기적으로는 어떤 부분에서 다르게 바라보시나요?

송 : 대한민국에서 가정폭력처벌법 개정은 쉬운 일도 아니고 바꾼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릴 듯합니다. 그러면 그동안의 데이트 폭력 피해자들은 어떻게 할 거냐의 문제 인거에요. 현실성을 고려하면 교제폭력만을 다루는 새로운 법 제정이 훨씬 빠를 테니 전략적으로 선택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해요. 그렇다고 단기적으로 교제폭력을 따로 먼저 입법하고 장기적으로 천천히 포괄하는 법으로 개정시키자고 주장하기도 어려워요. 법이라는 게 한번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다른 법이랑 합치거나 바꾸기가 쉽지 않거든요.

Q : 단기적으로 교제폭력만을 다루는 별도의 법을 제정했을 때 걱정하시는 점은 무엇인가요?

송 : 지금 가족을 구성하는 형태나 친밀함을 형성하는 관계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법의 범위를 좁게 막아둔다면 앞으로 더 다양해질 관계들을 포괄하지 못하는 문제가 계속 발생하죠. 친밀성에 기반해서 일어나는 폭력의 특성이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에 하나로 모아놓는 게 피해자들한테는 현실적으로 유연한 방법이거든요. 그리고 가정폭력이든 데이트 폭력이든 본질적으로 똑같기 때문에 피해자에 대한 지원 역시 동일해야 하는데, 법률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그렇게되지 못할 가능성도 있어요.

Q : 입법에 있어서 단순히 현안만을 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시각에서 사회 전체를 바라볼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말씀하셨던 바와 같이 지금 사회는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법을 만들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 있는 문제에대해 빠르게 발의하고 빠르게 입법하는 분위기로 느껴지는데요.

송 : 사실 지금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혹시나 사건 하나가 크게 일어나면 갑자기 훅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에요. 그러면 차근차근 담론을 거쳐 진정으로 피해자를 위한 법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여론이 말하는 방향대로 아무렇게나 만들어 놓게 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전과 안 남는 상담 처분 받을 수 있는 루트를 만들어버리는 식으로 진행된다면 완전 엉망진창 되는 거니까. 입법 여부보다는 어떻게 입법될 거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문제를 근본적으로 짚어가며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정폭력처벌법을 만들고, 이 법이 모든 친밀한 관계를 포함할 수 있도록 개정해 나가는 것이 피해자를 위한 길일 것이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단순히 새 법을 제정하는 쪽이 훨씬 빠르다는 현실에 맞닥뜨린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전체 맥락을 살피는 대신 시의성에 따라 여론에 휩쓸리듯 입법하는 기조에 편승하는 것이 더 현실적일지 모른다는 말하는 송 대표의 표정엔 씁쓸함이 가득했다.   


문제의 시작점으로

교제폭력을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는 태도, 별도로 입법하고자 하는 경향, 그리고 공식 통계조차 없는 정부의 대응까지. 이 모든 상황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송 대표는 피해자의 죽음을 막지 못했던 인식의 문제가 비단 수사기관과 입법부만의 것은 아니라고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 우리 사회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더 큰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송 : 사회에서는 교제폭력 문제를 개별 남성, 또는 인간들의 일탈 문제로 본단 말이에요. 어떤 사건에 사회적 관심이 몰렸을 때, 주목받은 가해자만 세게 처벌하고 신상을 공개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사실 그 사건만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대부분의 사건들이 유사한 과정으로 전개되고 있다면 이건 개인의 일탈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봐야 하는 거예요. 반드시구조적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고 접근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용서해 주기만 한다면 국가나 사회가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라는 인식이 여전히 강한 거죠.  

여성들에게 가장 위험한 공간이 집이라고 하잖아요. 여성들이 가장 많이 죽임을 당하는 것도 친밀한 파트너에 의해서고요. 대한민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맥락적으로 보는 게 중요해요. 제3자들은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왜 신고해, 또 취하할 거잖아’, 이런 식으로 접근을 많이 하는데 사실 그건 단면만 봐서 그렇거든요. 두 사람의 관계가 평등한지, 그리고 제대로 된 도움받을 수 있었는지를 통틀어 바라보는 인식이 자리 잡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문제의 원인이 개별 주체에게 있다는 시각에서 벗어나 교제폭력의 구조적 원인을 직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실재하는 위험에 대응하는 대책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식의 변화에서 더 나아가, 마주한 현안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며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정치참여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허 : 교제폭력 관련해 우리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정부와 국회에게 끊임없이  대책을 촉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22대 국회는 보다 큰 책임감을 갖고 국민의 엄중한 요구에 답해야 해요.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정부와 국회는 역할과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고, 이에 대해 국민은 호되게 질책할 권리가 있어요. 정치혐오와 냉소, 무관심은 우리를 대표하는 권력자들이 민심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요. 국민들에게 이롭지 않은 여건이 생성되는 것이죠. 젊은 세대를 필두로 한 많은 국민들이 사회적 현안에 우려를 표하고, 국회 및 정부에게 책임감 있는 대책을 요구할 때 피해자 보호에 가장 효율적인 법률이 완성될 수 있어요. 나아가 법률뿐 아니라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에서도 유의미한 변화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 모두가 서로를 보살피고 관용하며 연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응집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교제폭력을 다뤄온 잘못된 선입견을 넘어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는 과정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동안 친밀한 관계 속 폭력은 폐쇄적인 개인 간의 갈등으로만 치부되었으나, 이제는 그 관계가 피해자에게 어떠한 족쇄로 작용하는지를 보다 면밀히 살필 때다. 교제폭력을 관통하는 원인을 파악하고 사회 구조의 폭력 아래서 더 이상 개인이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할 때 비로소 입법자들은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제대로 된 입법과 더불어 바뀐 사회적 인식은 수사, 사법기관의 집행하는 자들의 태도를 변화시킬 것이고 결국에는 여성들이 수많은 신고에도 죽음에 이르는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친밀함은 폭력을 무마할 명분이 아니지만, 그렇게 쓰인 역사는 너무도 길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도 그 말 아래 가려져 미처 보지 못했던 이들, 드러나지 못했던 피해들이 있을 수 있다. 한국여성의전화 송란희 대표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주변에서, 또는 독자 중에도 이런 문제를 겪고 있는 친구들이 있을 거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고 너는 왜 만났다 헤어지고 그러니 막 이러면서 피해자 비난하기 너무 쉬운데 (교제폭력은)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요. 내 연애가 굉장히 힘든 연애구나, 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꼭 외부에 연락하시면 좋겠어요. 그러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연애는 힘든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준비되어 있는 단체나 이런 데 연락하셔라 그 얘기를 하고 싶어요. 

교제폭력은 사회 구조에서 비롯되지만 정작 그 피해는 오롯이 개인이 짊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는 개인이 해결할 문제도, 해결이 가능한 문제도 아니다. 폭력을 낳는 구조를 인식하고 이를 발본적으로 변화시킬 담론을 만들어 가는 것이 급선무다. 이를 토대로 국민의 목소리가 관철될 때 사회가 피해자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1] 스토킹처벌법에도 원래 적용이 되어 입법되었으나 2022년 발생했던 신당역 살인 사건 이후 개정되어 반의사불벌죄 적용이 빠지게 되었다. 송 대표는 이 개정에 대해서도 앞서 지속적인 폐지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가 신당역에서 이미 피해자가 숨지고 난 후에 국민의 여론에 따라 국회에서 갑작스럽게 개정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2] 예를 들면 스토킹에 대해선 ‘스토킹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로 구분되어 있다.


[3] 처벌불원은 앞서 말한 반의사불벌죄 적용을 뜻한다. 상담조건부 기소 유예는 가정보호사건에서 가해자가 성실하게 가정폭력상담을 받는 것을 조건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하는 것을 말하며 ‘가정 보호’의 목적에 초점을 맞춰져 있다. 이 경우  실제로 가해자에 대한 사후 모니터링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피해자 보호가 목적이 아니기에 여성들을 폭력에 노출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4]  “교제폭력엔 명확한 전조 증상…‘강압적 통제’ 범죄로 처벌해야”, 경향신문, 2024.07.23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7232033005


[5] 송대표 또한 동일한 내용을 언급했다. 잘 보면은 가정폭력 안에도 성폭력이 포함되는 경우도 많고 스토킹이 결합되어 있기도 하거든요. 이렇듯 복합적으로 연결되는 문제입니다. 라고 전하며 폭력을 정확히 양상 별로 경계를 나눠 적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유의미하지 못함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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