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부터 서점만 보면 근거리 광원을 발견한 벌레처럼 돌진했다. 집에 가는 길에는 근처 서점에 들렀고 여행을 떠나도 지역 독립 서점에 방문하는 일정을 끼워 넣었다. 뭐가 뭔지 몰라도 아무 책이나 한두 권씩 구매했다. 특유의 도장을 찍어주는 곳도 있었고 엽서를 끼워주는 곳도 있었다. 서점들의 SNS 계정에 팔로우를 눌렀다. 가본 곳에도 누르고 갈 곳에도 누르고 안 갈 곳에도 눌렀다. 작가들의 북토크나 낭독회를 구경하거나 소규모의 문학 강의를 들어 보기도 했고 뭣 모르고 포럼에도 참여해 본 적 있다. 읽고 싶은데 뭘 읽을지 모르겠으면 서점으로 향했고, 배우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배울지가 막막하면 서점 홈페이지를 뒤적거렸다. 그 과정이 분명 앎을 향한 방황 없는 직항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좋은 입문이라곤 할 수 있었다. 어설프지만 안목을 길렀고 놀라운 인연을 발견하기도 했다. 내게 동네 서점은 일종의 인문학 아지트 같았다.
큐레이션도 그 자체로 소비재인 시대다. 범람하는 과잉 정보 사이에서 유효한 데이터를 선별하는 작업은 번거로울뿐더러 쉽지도 않은 일이다. 데이터 스모그(Data Smog)의 온라인, 수없이 쏟아지는 신간과 매일 생겨나는 신생 출판사 사이, 책방은 일종의 문화 큐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이상의 배움과 경험을 구할 수 있기에 ‘문화’고, 양질의 책을 선정해 눈에 띄도록 배열한 편집본이기에 ‘큐레이션’이다.
알고리즘이 매끈하게 편집한 추천 도서와 베스트셀러 목록을 떠나고 싶다면, 교양 지식을 좀 쌓고 싶다면, 혹은 전부 모르겠고 그저 식당-카페의 무한 루프가 지겨울 뿐일지라도, 독립 서점 방문은 꽤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책과 당신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눈여겨볼 만한 독립 서점 두 곳을 소개한다.
해방촌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
월-수 13:00~20:00, 목-일 13:00-22:00
‘사유의 불을 지피는 책방’
풀무질은 관악구의 ‘그날이 오면’과 함께 서울권 내에 단 두 곳밖에 남지 않은 ‘인문사회과학서점’이다. 열띤 토론장이자 사상과 이론의 공급처였던 서울권 인문사회과학서점이 난세와 경영난으로 줄줄이 폐업했지만, 그날이 오면과 풀무질만은 명맥을 이어갔다. 홈페이지에 방문하면, 책으로 뿌리내린 사상의 숲을 거닐고 얻은 땔감으로 사상의 불을 지피는 책방이라는 소개 문구를 확인할 수 있다. 간판 위에 ‘동물해방물결’ 팻말을 걸고 있는 풀무질에서는 동물, 환경, 노동, 장애, 그리고 여성 등을 다루는 인문·사회 서적을 주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여러 시 창작 수업과 읽기 모임, 북토크 등의 행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인스타그램 계정과 홈페이지에서 모집 중인 프로그램을 확인할 수 있다. 1985년부터 38년간 성균관대학교의 옆자리를 지킨 풀무질은, 2024년 2월, 해방촌으로 이전했다.
지하철을 타고 녹사평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짙은 녹색 벽에 큼직한 대문이 있는 두 층짜리 건물에 풀무질이 있다. 풀무질은 1층과 지하층을 사용하고, 함께 자리를 옮긴 동물해방물결[1]이 2층을 사용한다. 지하에 있어 어쩐지 비밀스러운 공간처럼 느껴졌던 혜화 풀무질과 비교하면 색다른 모습이다.
서점을 운영하는 김치현 점장(사회 12)은 성균관대 출신이다. 대학생 시절의 기억을 묻자, 1학년 때 C+을 잔뜩 받고 사회학과로 진입한 후, 학회만 일곱 개씩 들어갔던 머리 긴 이상한 애였다며 자신의 모습을 회고했다. 풀무질에 본격적으로 드나든 건 글로컬문화콘텐츠 전공 수업에서 만난 학우들 네 명과 스터디를 계획하면서부터였다.
다섯 명이 매주 한 번씩 모여서 스터디를 하기로 했어요. “뭘 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모이자!”가 됐는데, 그중 한 분이 풀무질 사장님하고 친하셔서, 그냥 매주 풀무질에 가서 두 시간씩 떠들었어요. 영화, 책, 동화책, 게임도 하고, 별걸 다 했던 것 같아요. 팟캐스트도 한번 해보고, 웹진도 한번 만들어보고. 그때 풀무질 되게 어려울 때였거든요. 그래서 풀무질 되살리기 프로젝트를 우리가 하자고 막 그랬어요.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편 매대에는 풀무질과 동물해방물결 기념품, 신입 책방지기가 선정한 시집들이 놓여있고, 왼편 매대엔 동물, 여성, 노동, 장애 등을 다루는 다양한 신간이 올라가 있었다. 『학교에 비거니즘을』(휴머니스트)과 『학교에 페미니즘을』(마티)처럼 제목이 유사하거나,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발간되었으나 ‘여성과 사진’이라는 동일 주제로 묶일 만한 단행본을 함께 붙여놓은 모습도 눈에 띄었다. 학술서나 에세이뿐 아니라 희곡집 신간도 놓였다. 김치현 점장은 매대가 “딱 들어오자마자 가장 편하게 볼 수 있는, 어떻게 보면 싸이월드 대문 같은 것”이라며, “풀무질은 어떤 곳인지가(매대를 통해) 잘 보였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제가 장난치는 걸 좀 좋아해서요. 구간(舊刊)이더라도 신간과 엮일 것 같다 싶으면 같이 올려두는 경우도 있어요. 예를 들어 매대에서 가장 많이 들춰보시는 책 세 권이, 제목이 다 네 글자거든요. 『 애널로그』, 『엉덩이즘』, 『버자이너』.
혜화에서 해방촌에 오기까지 이어진 꾸준한 특징 하나는 책 배열이다. 일반적인 도서분류법이 변형 및 간소화된 KDC(Korean Decimal Classification) 체계[2]라고 한다면, 풀무질은 출판사가 분류 기준이다. 주제의 통일성에 얽매이지 않으며 출판사의 결을 살리는 방식이다. “출판사의 개성은 사실 주제보다도 제목이나 표지를 만드는 방식, 색깔 선택, 디자인, 그리고 출판사에서 붙이는 홍보 문구나 부제까지도 다 포함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책의 매력도 그런 요소를 모두 합산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책은 제 손을 거쳐서 팔리는 거니까 제가 매력을 느껴야겠죠. 그렇지 않으면 팔 마음이 안 생기고요. 그건 항상 그런 것 같아요. ...(중략)... 동물, 환경, 그리고 여성, 노동, 장애, 이런 쪽을 최대한 잘 골라서 다양하게 놓으려고 하고 있어요. 또 개인적으로 연극이나 희곡 쪽도 관심이 좀 많아서, 좋은 작품이 있으면 소개해 두죠. 이런 분야는 진짜 관심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잘 안 찾아보고 잘 모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좀 많이 소개하고 싶어요.
풀무질은 서점인 동시에 하나의 공간으로도 기능한다. 커피와 에이드, 감자 파이를 판매하는 카페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음악 감상실이나 공연장이 되기도 한다. 장벽 없이 누구나 놀러 올 수 있는 공간을 추구하기에, 전통적인 형태의 강의형 수업보다는 참여형 수업이나 모임의 형태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7월에는 책방지기 민구 시인의 <첫 시 쓰기>와 이형준 시인의 <시, 시, 시, 작> 등 시 창작 수업이 진행되고, 인문·예술 분야의 세미나 <기호와 정동으로서의 추(醜)>와 갖가지 북토크도 열릴 예정이다. 6월부터는 ‘마을 책방’으로 거듭나기 위한 프로그램 <책방은 여럿이서 들어야지>을 개설해, 자율적인 독서 모임의 장소로 풀무질이 쓰이기도 했다. 책이 진열되지 않는 지하층에서는 연극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6월 16일에는 풀무질, 동물해방물결, 비건클럽[3], 미암미암[4]이 함께 기부 장터를 진행하기도 했다.
서점 풀무질도 아주 중요한 브랜드고 저희가 지키고 싶은 가치이지만, 공간 풀무질이라는 이름도 함께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근데 이때 공간 풀무질은 갤러리로서의 장소(space)만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곳, 다른 데에서 하기에는 눈치가 보이거나 어려운 것들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고, 기존에 알려진 저희의 이름이나 역사성, 다루는 주제들이 너무 무겁다 보니까 좀 더 가벼워졌으면 좋겠어요.
풀무질은 서점을 넘어 “모두가 자유롭게 드나들고 연결될 수 있는” 마을회관을 꿈꾼다. 사상의 불을 지핀다는 표어가 결코 무겁지 않은, 모두에게 열린 인문사회과학서점이다. 인권과 동물권, 생명권 의제에 다가가 보려 한다면, 풀무질은 기꺼이 안전한 공간을 내어줄 것이다.
철학 전문서점 소요서가
화-토 12:00-20:00 (일, 월 휴무)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임마누엘 칸트의 계몽의 표어를 모토로 삼은 소요서가는 올해 7월 10일에 막 3주년을 맞이한 신생 철학 전문 서점이다. 서점의 운영 주체인 법인 ‘연구소오늘’은 소요서가를 “전문가에게도 가볍지 않고 애호가에게도 무겁지 않은 서점”을 표방한다고 소개한다. 문구 그대로 이곳에는 저명한 철학자들의 고전 원서와 해설서, 사변적 실재론이나 신유물론과 같은 현대철학 이론 등 철학 전반을 아우르는 서적으로 꽉 차 있다. 서점은 물론이고 출판과 아카데미도 병행 운영하고 있어, 인스타그램 계정이나 홈페이지에서 관련 공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을지로4가역에 하차해 청계천 옆 세운청계상가 3층 데크로 들어서면, 철물점 사이에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진회색의 작은 서점이 나온다. 이곳 소요서가의 운영진은 비단 철학 전공자뿐만 아니라 목수나 미술 교육자 등 다양한 분야의 종사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분야는 각기 다르지만 삶에 대해서는 비슷한 고민과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철학적 태도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바람으로부터 소요서가는 시작됐다. 개업 3주년이 되던 날, 소요서가에 방문해 윤성원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작할 땐 저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일을 하고 계신 분들이 의기투합했죠. 처음에는 공부 모임 같은 걸 좀 하다가, 책을 직접 만들어보기로 하면서 출판사를 운영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우리 책 외에 다른 책들도 같이 큐레이션해서, 사람들한테 ‘이런 책들도 같이 읽자’라고 제안하는 모델을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자그마한 공간 바깥 건물 외벽에는 그때그때 진행 중인 ‘아카데미소요’의 강의와 모임 포스터가 나란히 붙어 있다. 방문 당시에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이나 ‘멜라니 클라인의 정신분석학’ 강의, 철학 신간 읽기 모임이 있었고, 철학의 정체성을 살려 여타 분야와 엮은 수업도 많았다. 미술과 문학 강의도 예정되어 있었다. 다 빈치의 <모나리자>에서 시작해 고흐의 <밤의 카페>로 끝나는 미술 감상 입문용 세미나, 문학 비평을 위한 『미메시스』 강독, 현대미술사를 공부하고 마지막에 전시를 관람하는 수업 등이다. 프로그램의 분야와 수준이 다양하고 모두 매력적이기에 선택의 폭이 넓다.
윤상원 대표는 현재 소요서가의 다양한 운영진이 각양각색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개업 첫해나 작년까지는 매달 플라톤부터 하이데거까지 철학자들을 정해서 ‘이달의 철학자’로 삼거나 아카데미 주제에 맞게 ‘이달의 책’을 정하기도 했지만, 좁은 키워드 안에서만 철학을 다루기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약 3,000권의 서적으로 공간을 빽빽하게 채운 책장이 가장 먼저, 그다음 출판사 소요서가의 단행본 세 편, 철학 고전과 철학사 전집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입문자용 책과 전문적인 공부를 위한 전공자용 학술서가 한 공간에 있다. 매대엔 가볍게 읽을 만한 에세이부터 베스트셀러는 물론이고 유명 출판사의 인문·사회 문고판 시리즈나 문화 이론서, 대담집이 서로 연관된 도서끼리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서점을 한 바퀴 돌면 여러 종류의 철학서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좋은 책을 선별하는 일이 중요한 만큼 선별한 책이 돋보이도록 조합하고 배치하는 것 또한 무척 중요한데, 시기별로는 고대에서 현대, 분야별로는 종교철학, 과학철학, 페미니즘 등의 코너가 죽 늘어선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미셸 푸코, 질 들뢰즈를 거쳐 한나 아렌트, 도나 해러웨이까지 이르면 구경만으로도 시대별 철학가를 간략히 훑을 수 있다. 작년 소요서가에는 구비된 책 중 3분의 1을 사간 손님이 있었다고 한다. 인터넷 서점을 통한 컬렉션이 더 저렴하고 편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요서가만의 큐레이션을 산다는 개념으로 구매했다는 것이다.
특정 독자층이나 주제에 너무 편중되어서도 안 되잖아요. 일단은 철학 서점의 정체성에 맞는 철학 고전이나 해설서가 우선이지만, 철학에 입문할 수 있는 좋은 징검다리가 되는 다양한 장르들의 책을 선정한다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프로그램도 철학 서점의 정체성을 살리면서도 입문을 도울 만한 문학, 예술 등 다양한 장르들을 이용하고 있고요.
철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면, 공부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윤상원 대표에게 철학에 입문하는 법을 묻자, 일단 소요서가에 오면 된다는 간명한 정답을 들을 수 있었다. 보드리야르의 특정 이론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철학사를 전부 알 필요는 없듯, 좋아하는 대상에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훈련을 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우리가 가져왔던 삶에 대한 고민과 태도는 모두 철학적인 관심에 속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이미 철학에 관심이 있는 셈이다. 그러니 특정 책이나 학자에서 시작하려 하기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질문에서 출발해 보자는 것이다.
철학을 꼭 특정 책, 특정 학자에게서 시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관심 있는 예술, 영화나 문학작품도 좋고, 여러 가지 장르들이 있잖아요. 저희가 (특정 학자나 키워드를 떠나서)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모임을 만들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예요. (중략) 관심 있는 장르가 있다면 그 장르에서부터 질문을 던져보고, 질문을 던지는 연습들이 누적되고, 그 질문들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던졌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하면, 그런 내용들이 철학 공부로 이어질 수 있는 거죠. 그렇게 발전시킬 수 있는 거예요.
철학은 언뜻 현실에서 먼 학문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당장의 생활을 위해서는 눈앞의 실용서나 자기계발서를 읽는 편이 더 효율적인 듯 보이지만, 철학은 언제나 삶 속에 살아있다. 이를테면 ‘비인간’과 ‘포스트휴먼’을 다루는 SF소설을 읽을 때, 추리·논증 실력 증진을 위해 논리학을 공부할 때, 신자유주의나 통치성(governmentality) 따위의 개념을 공부하다 마르크스와 푸코의 저서에 닿을 때. 존재와 예술과 사회와 정치를 넘나드는 철학에 입문하고 싶다면, 우선 소요서가에 방문해 보자. 서가는 당신의 질문을 향해 열려있다.
[1] 종차별 철폐와 동물 해방을 목표로 활동하는 비영리단체로, 풀무질 대표 전범선 씨가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2] 쉽게 ‘분야별 정렬’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십진분류표(KDC)는 주제를 000(총류)부터 900(역사)까지의 10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각 유형을 다시10가지로 세분해 도서를 분류한다. 교보문고의 경우 앞선 분류법을 간소화하고 새 유형을 추가해 A(잡지, 만화)부터 K(종교)까지 11개로 나눈다.
[3] 비거니즘의 확산을 목표로 비건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4] 해방촌 소재의 와인바로, 두 가지의 비건 메뉴를 함께 판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