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팥빙수
여름날, 두 사람만의 비밀

☀️그리운 한 그릇

by Barakan

☀️ 기억 속 그 한 그릇, 마음까지 데워주던 음식 이야기


음식이라는,

그릇에 담긴 따뜻한 추억과 살아있는 감정을
조용히 풀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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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성정이 불 같으셨다. 논바닥이든, 집에서든 심지어 식사 때조차 버럭 화를 내실 때가 많았다. 어린 내 눈에도 별 일 같지도 않은 일에 큰소리가 나면, 어머니와 온형제들은 찍소리 못하고 숨을 참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정도 참 많으셨다. 식사 때마다 찾아오는 거지조차 마다하시기는 커녕, 밥상을 굳이 차리게 해서 내놓게 한 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그냥 식은 밥 한덩이 줘서 보내면 되지, 별스럽게도 무신 상을 차리라 하노…!”
하는 잔소리는 좀 하셨지만, 그러려니 하고 밥상을 차리셨다. 때론 축담 위에다 심지어 많은 식구들로 넓지도 않은 마루 한 켠에다 독상을 대접하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럴 때면, 세상 물구경이라고는 안 한 베베 꼬인 머리칼과 덥수룩한 수염으로 특유의 냄새까지 풍기는 사람과 같은 마루에서 밥을 먹는다는 사실에, 비위 좋던 나도 밥을 먹는 내내 움찔움찔하며 얼굴을 찌푸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인근 면소재지 오일장이 서는 날은 아버지는 나를 잘 데리고 다니셨다. 아버지를 따라 장날 구경 가는 건 요즘 ‘에버랜드’ 같은 놀이공원 들어가는 것 못지 않게 너무 좋았다. 그 흥겹고 좋은 날엔 오리가 채 안 되는 길을 으레 아버지의 큰 짐차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갔다.
“단디 꼭 잘 잡으래이…” 하는 아버지의 우려 섞인 말과 함께 집에서 출발했는데,
애호박 만한 자갈이 널려 있는 신작로로 가야만 했다. 그 울퉁불퉁한 길을 뒷자리에서 자전거가 퉁퉁 튀어도, 비틀거리며 달려도 엉덩이가 아프거나 무섭기보다는 춤추는 것 같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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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날엔 온갖 과일이며 생선, 시선을 끌만한 새 옷에 알록달록한 베갯잇과 이부자리까지 장터가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찼다. 줄줄이 다라이가 죽 늘어서 앉은 떡집 골목도떡집 골목도, 아버지 친구분의 작은 구두방에서 연탄불에 구워 주시던 인절미도 쫄깃하니 좋았다. 하지만 뭣보다도 제일 찌릿하게도 기억나는 게 있다. 그건 시장 구석에 자리잡은, 여름이면 사람들로 북적이던 빙수집이었다. 거긴 활짝 열린 큰창으로 훤히 보이도록, 큼지막한 각얼음을 틀에 끼운 팥빙수기계가 놓여 있었다. 뾰족한 나사 같은 게 박힌 그 틀에 올려진 각얼음은 손잡이를 설컹설컹 돌릴 때마다. 국사발처럼 큰 그릇에 수북히 간얼음이 쌓였다. 그 하얀 얼음 그릇 위에다 달달한 삶은 팥을 그득히 올려주면 그건 한여름 사람들을 홀릴 만한 비쥬얼이었다.
아버지가 그집으로 어린 내 손을 잡고 들어간 날은, 내 인생 최초로 팥빙수를 영접한, 내 기억에 각인되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난생 처음 천국을 만나 몸을 움찔거렸다가, 엉덩이까지 덜썩거리며 먹었던 그 환상적인 맛의 감동적 순간을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그리도…맛있나?.허허…”
그럴 땐 아버지는 흐뭇하게 바라보시며 너털웃음을 웃으셨고, 어린 나는 그런 아버지가 한없이 든든했고, 팥빙수만큼 달달하게도 좋았다.
“…그런데 말이다. 집에 가면 절대 팥빙수 먹었다고 얘기하지 마라. 알겠재?”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다짐을 받으며 물으셨고, 어린 나는 그 이유를 알듯말듯했지만,
“예, 아부지…”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때 난 집에 돌아가서,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어머니께도 팥빙수 얘기는 절대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건 아버지와의 약속도 있지만, 두사람이 공유한 은밀한 비밀을 즐겼는 지도 모르겠다.


그 많은 자녀들을 일일이 챙길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지금은 나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땐 몰랐던 마음인데, 이젠 피식 웃음이나온다. 어린 아들에게 그 여름 장날, 팥빙수를 사주시고선, 그 맛에 몸을 들썩이며 먹는 아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런 정 많던 분이 내 나이 7살, 막둥이 남동생 5살짜리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마음이란….참…


어느덧 그 여름날의 아버지보다도, 지금의 내 나이가 더 들어버렸다. 요즘엔 빙수가 참 다양해졌다. 여러 과일이 먹음직스러운 빙수도 있지만, 내게 최고는 역시 달짝지근한 팥이 올려진 빙수. 그 시절 아버지의 흔적을 가만가만 더듬어 보게 만드는, 팥빙수에 비할 빙수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 한 그릇의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지는 듯하다.
여전히 고맙고도, 참으로 그리운 한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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