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聖心)밖에 몰랐던 사랑 방식.
이별은 항상 아렸다. 소년일 적부터 지금까지 이토록 내 지주(支柱)를 흔드는 이 지진은 대체 어느 곳에서 근거하는 걸까?
9살 때, 처음으로 이별이라 부를 수 있던 순간을 추억한다. 고향친구 영이와 주형이. 어른 손바닥 만한 스파이더맨 게임 CD와 볼펜세트는 잘 지내라는 작별인사와 함께 내 손에 쥐어졌다. 동틀 새벽녘이었다. 우리 가족은 상경해야했고, 나는 봉고차 안에서 30분을 오열했다. 생애 첫 이별을 맞이한게 그렇게도 충격이었는지, 히끅이다가 선잠들기를 3시간 동안 반복했다. 나는 결국 지쳐 잠들었다. 9살배기 애가 끝없이 울기엔 금산과 서울은 너무도 멀었다.
꿈속에서 나는 나만의 작은 공간을 마음속에 만들었다. '많이 보고 싶어'가 내 공간의 이름이었다. 32살의 내가 골똘히 생각해 보면, 그 공간의 이름은 '닿지 않아도, 나는 너를 추억할게.' 겠다.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시작된 상경. 셋방살이조차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방구석 한편에 CD와 볼펜세트를 꼭 보관해 놓았다. 금(金)도 묻어두면 쓸모가 없다던가? 틀렸다. 금은 시커먼 우주 속 찬란한 지구이고, 금은 적야(寂夜)만 존재하는 산기슭의 개울소리다. 내게 금은 충남 금산이었으며 끝내 이별하지 못한 내 친구였다.
결국 게임 CD와 볼펜은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자취를 감추었다. "내 보물 돌려줘!"라는 생떼는 이사준비로 바쁜 어른들의 외면을 샀고, 나는 처음으로 어른들이 참 고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도 이사가 좋은가? 나는 큰아빠집도 새집도 가고 싶지 않은데. 새로운 친구보다 영이와 주형이가 더 좋은데.
그래서 '많이 보고 싶어'에 채워질 영이와 주형이를 더 각인했다. 스파이더맨 게임 CD에 영이 이름 하나. 볼펜세트에 주형이 이름 하나. 우리가 알아야 할 추억을 나는 내 마음속에 하나씩 조각했다. 더는 아프지 않게, 비산해도 잊지 않게. '많이 보고 싶어'엔 어느새 첫 가구가 들어섰고, 그 마호가니 색 찬장 안에 영이,주형이와 뛰놀던 금산 약수터 농구장이 마련됐다.
32살, 여전히 난 모두와 그 추억을 마음속에 아로새긴다. 비록 내 주변은 쏜살같이 변해갈지라도, 나만큼은 모두를 목도하고 기록하려고 무딘 애를 쓴다. 함께 했던 시간이 길었다면 음각을 강하게 새겨 입체감을 더했고, 같이 했던 추억이 짧았다면 말줄임표를 세개 찍어 말미를 남겨두었다. 나만의 방식으로 모두를 추억했고, 특별한 인연은 마호가니색 찬장에 두어 두고두고 추억했다.
사람 관계 다 시절인연이니까 포스트잇을 쓰라는 주위의 만류를 흘려들은 지 오래다. 시대가 어느 땐 데, 조각칼 하나와 펜 하나를 들고 사람을 각인할까. 자조하는 일은 이미 이골이 났다. 어느 예술에서 나무불상 깎는 노인을 본 적이 있다. 조각을 빚어내는 손길에 정성과 참회를 담더라. 손바닥 만한 무명(無名) 나무 토막이 의미를 갖고 탄생하는 순간. <돌의 미학> 에서 피가 도는 석상이 서구의 희랍과 같다는 그 의미는 필시 목우(木偶)의 탄생과 동일하리라. 당신은 내 안의 상(象)이고 객체(客體)이니, 고유하리라.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마음을 다하게 된다. 당신과 내가 눈을 마주치는 찰나를, 함께 마주한 이 청천백일을, 그리고 같이 보는 이 묘경을 우리는 함께했다면, 나는 이것이 또 하나의 인연임을 느낀다.
인연을 추억하면 이어진 시간선이 양극(陽極)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그 실타래가 어디로 수렴하는지 실컷 실을 내빼내다 보면 그게 곧 현재로 수렴한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있다. 그 때마다 나는 라케시스가 더 전능했음을 바란다. 나도 실 한올을 추억으로 빚고 마음으로 다듬어 낼 수 있다면 . CD와 볼펜뿐만 아니라 무진(無盡)하게 무량(無量)히 베를 짤텐데.
이윽고 아트로포스가 실을 자르는 순간이 올 때, 나는 그것이 인연이었음을 다시 실감한다. 제 아무리 '지나간 인연에 상처받지 말라' '모든 인연은 다 시절인연이니 그에 익숙해져라' '모두가 그러는게 당연지사다'라고 해도, 나 만큼은 그것이 티끌 우주에서 전인미답의 인연임을 안다.
그럼에도, 야속한 인연은 언제나 제자리를 찾아가고 이제는 내 인연도 전인전답이 된다. 현관문 외시경 앞에 선 나는 렌즈를 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찾아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이별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음을.
'많이 보고 싶어'는 다시 강진을 맞는다. 조각가의 흐느끼는 손아귀엔 침착한 칼끝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트로포스가 시퍼런 날에 우리의 실을 경사해도 문을 열지 않을 수는 없다. 시간의 양극은 수렴하기에. 손님을 환대 하는 것이 내 의무 임을 알기에.
양손에 꽉 쥐어 놔주고 싶지 않았던 내 성심(聖心)의 나무인형. 손때탄 내 정성이라도 건넬 수 있으니, 나는 다행이라는 위선을 쓰고 이별에게 목우(木偶)를 선물한다. 결국 내 지진은 포스트잇이 아니었고 목우가 아니었으니, 단지 조각행(彫刻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