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작가(冀作家)

타인의 천명(闡明)을 거스르게 하는 내 항서(抗書)

by 삼지창

두서 없이 쓴 내 글이 못남을 이해해주십시오. 나는 정갈하기 보다 투박하기를 택했습니다.


문우이자 뮤즈인 현루. 26년 1월, 내 세상에서 그대는 감히 내 문우였습니다. 인연이 도와주어, 우리는 글 속에서 처음 마주하게 됐죠. 작문 세상 속 우리는 동료였습니다. 단지 라면에 관한 사유로 말미암아 겨우 연이 닿게 된 글벗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글 벗의 유감스러운 소식을 고작 내 손 안에서 너무 간편히 접하고 말았습니다. 하루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 내 글감이 담긴 창고에서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알림이 삽시간에 떨어진 겁니다. 어찌나 무거운지, 창고의 돌덩이가 싸리빗자루로 걷어지지 않더군요. 요즘 말을 빌리면, 밀어서 스와이프 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내 집으로 걸어가는 그 15분 남짓한 길을 걷는 와중, 그대의 근황이 결국 내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했습니다. 집을 향한 내 발걸음도 이윽고 서서히 멈췄습니다. 나는 끝내 서서 읽고 맙니다. 동장군이 위세를 떨치는 1월 30일. 세찬 바람이 결국 내 마음의 수분을 남김없이 앗아갔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습니다.


나는 그대가 저급한 작가였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내가 실망했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런 내 마음 또한 유난하지 않았을 테죠.


그대가 그저 그런 작가라는 평행 세계가 있길 바랍니다. 내 실망이 잔인한 현실과 맞바꾸게 되는 그런 세계가 있길 소망합니다. 사실 당신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독자나 현혹하는 작가였던 겁니다. 암이라는 고통조차 세간의 이목을 끌려는 잔꾀에 불과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내 실망과 교차하는 그대의 허구. 관계와 맞바꾸는 현실. 얼마나 유익합니까? 당신은 더 오래 살고, 더 오래 쓰고.


하지만 이번 우주에서는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내 문우이자 비범인(非凡人)인 그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나는 찬 바람을 맞고 있는 현실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춥습니다. 마음뿐 아니라, 이 글을 작성하는 내 손도 덩달아 얼어갑니다.


이 글의 제목은 기작가(冀作家)입니다. 바랄 기(冀)는 귀신 가면을 뒤집어쓰고 양 팔을 들어올린 사람이 북을 향하는 상형자입니다. 바라는 거죠. 사람이. 북쪽에게. 미지의 존재를 흉내내면서.


웰다잉(Well-dying)을 희망한다구요. 모름지기, 모든 작가는 웰다잉입니다. 우리가 작가를 희망하는 순간에, 무엇을 세상에 남길지 저마다 결심하니까요. 그 증거로, 마치 라면에 관한 사유 단 한 꼭지에 우리 세상을 쏟아 내지 않았습니까? 결국 사유에 대한 깊이와 성찰이 서로 닿았죠. 우리는 세상에 쏟아 내기 위해서 내 안에 담잖아요. 바라는 거죠. 우리가. 세상에게. 세상의 한 줄이 남길 희망하면서.


내가 발행했던 글 ‘조각행’ 기억하나요? 나는 그대에게 한 꼭지로써 내 목우(木偶)를 주었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라케시스에게 참 고맙습니다. 우리의 실 한 가닥을 훌륭히 가다듬어 줬죠. 그러나 이제 아트로포스가 온 듯합니다. 이제 매듭만이 남았다고 한 걸까요. 또 나는 현관문을 열어야 하는 겁니까.


사실, 나는 내 목우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가 쾌차해서 나랑 평생 글로 교류했으면 합니다. 사견과 사유를 계속 연재해주기를 바랍니다. 내 마호가니 찬장에 그대를 남기지 않고, 그 찬장 문을 활짝 열어 우리가 나눈 사유를 안주 삼아 같이 술 한잔 하는 거죠. 그래서 그런지 나는 시간의 양극이 밉습니다. 시간이 수렴한다는 사실이 원통하네요.


쾌차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아트로포스가 우리 인연을 시퍼런 날에 갖다 대게 하지 않도록 노력해주십시오.


삶을 갈무리하는 와중에 이런 내 부탁이 아니꼽게 보일 것을 압니다. 연명치료나 항암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아래, 이런 내 말이 그대를 괘념(掛念)케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기하겠습니다. 미안하지만, 쾌차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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