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으로 가득 찬 삶

종교와 철학이 전하는 위안과 해석

by 백세주
"나는 아픈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란 인간은 통 매력이 없다. 내 생각에 나는 간이 아픈 것 같다."
— 『지하로부터의 수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비루한 현실의 중력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은 태어난 이상 누구나 이 질문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이 질문은 어떨 때에는 든든한 나침반이 되어 삶의 올바른 방향을 찾아주기도 하고, 또 어떨 에는 새벽밤을 지새우게 는 고민거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대게 어제보다는 나은 삶,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 의미 있는 삶, 즉 '잘 사는 삶'을 갈구합니다. 하지만 이 고결하고 고차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 주위를 둘러볼 때, 가장 먼저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처절하고도 신랄한 현실의 벽입니다. 그저 살아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의 뒷면에는 살아있음으로써 필히 견뎌내야만 하는 끊임없는 괴로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당신의 삶이 주는 첫 답은 것입니다.

삶은 '고통'입니다.

우리는 습관처럼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 고통이 대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그 실체를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 살아보려 노력하는 당신을 번번이 무너뜨리는 고통은 영화 속 비극과 같은 거창한 사건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의 고결한 의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일상을 아주 사소하고 비루하게 파고드는 균열들입니다. 어떤 게 있을까요? 출근을 준비하며 무거워지는 일요일 밤. 고문 같은 알람 소리, 지하철의 축축하고 불쾌한 공기, 불합리한 업무 명령, 모니터의 건조한 열기, 간헐적인 두통과 소화 불량. 당신의 하루는 이미 고통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하루 종일 피곤하고 짜증이 났다가도, 어느새 따분하고 외롭기도 합니다. 가끔은 죄책감에도 짓눌리고, 헤어 나올 수 없는 우울감과 절망감에 휩싸이기도 하죠. 인간이라는 존재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맷돌 사이에 끼어 매일매일 조금씩 갈려 나갈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고통을 잊어보자고 발버둥 쳐봐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달콤한 주말의 휴식을 만끽하고, 때론 훌쩍 멋진 여행을 떠나보아도, 결국 고통의 시간은 다시 돌아옵니다. 찰나의 안락은 공짜가 아니기에, 우리는 평화를 위한 비용을 벌기 위해 다시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얼마나 비루한 현실입니까? 그렇습니다. 고통이란 마치 중력처럼, 우리가 날고 싶다고 애써 부정해 봐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기본 전제입니다. 이를 무시한 채 고결하게 이상적인 삶의 방향만을 논하는 것은, 맨발로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구름 위를 걷는 꿈을 꾸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심화되는 내면의 부식

우리는 때로 이런 생각도 합니다. 언젠가는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좋은 대학에 간다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다면, 사랑이 넘치는 가족을 꾸린다면. 허나, 고통은 당최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난 분명 노력했는데 말이죠. 왜 아직도 나는 괴롭고, 슬프고, 때론 눈물이 날까요. 대학 졸업장과 번듯한 직장, 그리고 안정적인 가정이라는 평범한 성공의 조건을 다 갖춘 당신은 남들 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완성된 인간일 텐데요. 왜 아직도, 겉으로는 합리적인 척 논리를 펴고 세련된 미소를 지으면서, "대체 왜 살고 있는가"라는 공허한 물음을 반복하게 될까요? 더 좋은 음식을 먹고, 깔끔한 옷을 입고, 편한 잠자리를 누리지만, 마음은 도무지 편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은 왜 여전히 괴로울까요?

문명의 발전 덕에 우리는 신체적 고통에서 해방되었지만, 아직도 심리적 고통에 빈번히 시달립니다. 특히, '어른'이라는 배역을 연기하는 건, 도무지 능숙해지지 않는 듯합니다. 감정을 억누르고, 예의 바른 가면을 쓰고,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완벽한 외피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실시간으로 파괴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연기가 완벽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우리는 강렬한 불편감에달립니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듯, 우리도 어른이라는 배역에 몰입하느라 정작 그 역할을 지탱해야 할 고유한 자아를 지하실 어둠 속에 방치하고 있습니다. 내면의 부식은 우리가 사회라는 거대한 구조물의 부품으로 편입되는 순간부터 피할 수 없습니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병든 인간'은 먼 이국땅 지하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 뭉치를 뒤적이는 당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남들이 좋다는 것을 좋아하려 애쓰고, 남들이 옳다는 것을 옳다고 믿으려 자신을 속여야만 합니다. 이 기만적인 평화가 길어질수록, 당신 안의 진짜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지고 끝내 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행히도,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남겨둔 지혜를 들춰볼 수 있습니다.


교가 전하는 자비와 희망

인간이 고통을 인지하기 시작한 이래 종교는 이 쉼 없는 괴로움을 삶의 피할 수 없는 전제로 규정해 왔습니다. 종교적 관점에서 고통은 우연한 사고가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부여된 숙명적인 과정입니다.

불교는 삶의 본질을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라고 선언합니다. 석가모니가 말한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현상이 본질적으로 고통이라는 통찰입니다.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 하는 슬픔이나 미워하는 이와 마주해야 하는 괴로움은 우리 삶의 변수가 아닌 피할 수 없는 기본값입니다. 불교는 이를 '불타는 세상'에 비유합니다.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무엇으로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불타고, 성냄의 불로 불타고,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다.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는 불로 불타고 있다."
— 『아딧따빠리야야 숫따(연소경)』

여기서 고통은 단순히 불행한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잡으려 하는 모든 것들이 찰나에 변하고 사라진다는 무상함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 불교가 내놓은 대처 방안은 지극히 내면적입니다. 불교는 고통의 원인을 '갈애(渴愛)', 즉 탐욕과 집착에서 찾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변화를 거부하고 영원한 것을 움켜쥐려 할 때 고통이 발생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그 해결책으로 '팔정도(八正道)'라는 구체적인 수행 체계를 제시합니다. 바르게 보고, 생각하며, 바르게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며, 바르게 노력하고, 알고, 집중하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흔들림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특히 '마음 챙김'이라 불리는 명상을 통해, 고통이 나를 관통할 때 그것에 이름을 붙이거나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그저 고요히 관조하라고 가르칩니다. 고통의 실체가 없음을 깨닫고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마음의 평온인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불교가 제시하는 근원적인 치유의 길입니다.

반면, 서구의 기독교 전통은 낙원을 잃은 인간이 가시덤불 가득한 땅에서 수고하고 땀 흘려야만 생존할 수 있는 가혹한 환경에 던져졌음을 명시합니다. 에덴동산이라는 완벽한 평온의 상태에서 쫓겨난 순간부터, 인간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가득한 땅을 스스로 일구어야만 하는 형벌과 같은 노동을 부여받았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 『창세기』 3장 19절

기독교에서 고통은 인간의 유한함과 결핍을 증명하는 징표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 가혹한 운명을 홀로 짊어지게 두지 않습니다. 고통에 대한 기독교의 대처 방안은 소망에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신이 직접 인간이 되어 고통받았다는 십자가의 서사는, 고통받는 자들에게 강력한 위로를 건넵니다. 나의 아픔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 신의 고통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믿음입니다. 또한, 기독교는 고통을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으로 승화시킵니다. 시련을 통해 인격을 단련하고, 기도를 통해 절대자와 연결됨으로써 고통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고통이 끝이 아니며, 눈물도 아픔도 없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다는 소망은 기독교인이 고통의 가시밭길을 견디게 하는 핵심적인 동력이 됩니다. 고통은 피해야 할 저주가 아니라, 더 큰 사랑과 영광으로 나아가는 가혹하지만 필연적인 관문으로 재정의됩니다.

종교는 믿음을 기반으로 우리에게 고통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충분한가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학이 전하는 냉철한 해석

적어도 철학자들에게는 종교가 충분한 답이 되진 못했나 봅니다. 철학은 종교가 건네온 이 숭고하고 자비로운 대안들에 의문을 던져왔습니다. 종교의 해법들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그 해법은 믿음이라는 높은 문턱을 넘어야만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근대에 접어들며 각 종교를 지탱해 주던 굳건한 믿음의 저편에는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믿음을 강요하며 약속되었던 천국이나 열반에는 쉬이 도달할 방안이 없어 보였고, 관조와 소망은 갈 곳 없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철학은 바로 그 지점, 깨달음의 빛이 비치지 않고 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차가운 벌판에서 인간의 고통을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철학자들은 종교가 믿음이라는 마취제로 덮어두었던 고통의 환부를 이성이라는 예리한 칼로 도려냈습니다. 그들은 삶의 비관적 본질을 폭로하며, 고통이 우리가 받아들이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바탕색임을 선언했습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종교가 말하는 만족이나 평화가 본질적으로 불가능함을 논증했습니다. 그에게 인간은 멈추지 않는 의지의 노예이며, 이 의지는 마치 불길과 같아서 무엇을 던져 넣어도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종교적 수행이나 기도가 잠시의 위안은 줄지언정, 우리 내면에 도사린 맹목적인 욕망의 엔진을 멈출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고통의 종류를 바꾸고 있을 뿐입니다. 굶주림이라는 고통을 해결하면 권태라는 고통이 찾아오고, 권태를 피하려 들면 다시금 새로운 갈증이 우리를 덮칩니다. 삶은 무한정복되는 지옥이며, 우리는 이 비참한 세상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적 대안들이 오히려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비판했습니다. 내세의 행복을 담보로 현재의 고통을 인내하라는 가르침은,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부정하는 '노예의 도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니체는 고통을 신의 시험이나 업보로 해석하는 대신, 그것을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려 하는 '힘에의 의지'를 발현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습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 『우상의 황혼』,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에게 고통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인간이 초인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밟고 지나가야 할 가혹한 계단이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초월적 위로에도 기대지 않은 채, 이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운명을 있는 그대로 껴안으라고 외쳤습니다. 철학은 이처럼 종교가 약속한 '나중의 평안'을 거부하고, '지금의 통증'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단련되는지를 집요하게 파헤쳤습니다.

결국 철학은 우리에게 위로 대신 직시를 선물했습니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으며, 우리를 구원해 줄 외부의 손길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차가운 진실입니다. 이 냉혹한 분석은 우리를 절망케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마주한 문제가 얼마나 거대하고 실재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자, 그럼 다시 한번. 충분한가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만 당신은 여전히 아프다

이제 우리는 인류가 내놓은 이 위대한 해결책들을 하나의 비유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에는 이른바 '두 대의 화살'이라는 고전적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첫 번째 화살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맞게 되는 물리적인 고통이나 시련을 뜻하고, 두 번째 화살은 그 고통에 반응하며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정신적인 괴로움을 뜻합니다. 성인은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자라고 하며, 마음의 평화를 통해 통증의 해석을 바꾸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종교와 철학이 공통적으로 빠져 있는 거대한 함정을 목격하게 됩니다.

첫째, 불교가 제안하는 관조의 한계입니다. 불교는 고통의 실체가 없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자문해 봅시다. 마음의 평온을 얻었다고 해서 내 살점을 파고든 쇠꼬챙이가 사라집니까? 쏟아지는 피와 신경을 타고 흐르는 비명 같은 통증이 그저 환상이라고 되뇐다고 해서 멎어듭니까? 명상은 고통을 참아낼 인내력은 길러줄지언정, 고장 난 시스템을 수리하거나 박힌 화살을 물리적으로 뽑아내지는 못합니다. 비바람이 몰아쳐 집이 무너지고 있는데, 눈을 감고 빗소리의 아름다움을 명상한다고 해서 젖은 몸이 마르지는 않는 법입니다.

둘째, 기독교가 제안하는 소망의 역설입니다. 기독교는 고통 속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고 내세의 안식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의미를 찾는 행위는 때로 현재의 출혈을 방치하는 합리화가 되기도 합니다. "이 고통에는 깊은 뜻이 있다"는 믿음은 영혼을 지탱해 줄지 모르나, 당장 곪아 터진 환부를 도려내지는 않습니다. 의미에 매몰되는 순간,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보다 견뎌내려는 인내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됩니다. 상처가 썩어가고 있는데 그것을 영광의 흔적이라 부르며 보듬고만 있는 것은, 치유가 아닌 지연일 뿐입니다.

셋째, 철학이 제안하는 직시의 잔혹함입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종교의 마취제를 걷어내고 생의 비참함을 똑똑히 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실을 보여주며 갖추었던 냉철한 합리성에 비해, 그 진실에 대한 대안은 지독하리만큼 추상적이며, 때로는 평범한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정신적 도약을 요구했습니다. "인생은 원래 괴로운 것이니 견뎌라" 혹은 "고통을 사랑하며 더 강해져라"는 말은 지적으로는 우아할지 모르나, 매일 비루한 현실의 중력에 으깨져 신음하는 개인에게는 또 다른 폭력에 가깝습니다. 분석과 해석은 문제를 정의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그 자체로는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인정해야 합니다. 마음의 평온을 얻거나, 고통에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 비참함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 삶의 진짜 비극은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살점을 찢고 들어오는 그 첫 번째 화살들을 피할 방법이 여전히 없다는 것입니다. 텅 빈 통장 잔고, 무너진 인간관계, 삐걱거리는 육체, 그리고 매일 우리를 소모시키는 비루한 일상의 결함들. 이것은 해석으로 지워지는 환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결함이자 통증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살에 맞은 운명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점을 파고든 그 차가운 쇠꼬챙이를 당장 뽑아내고, 찢어진 부위를 봉합하여 실질적인 치유로 이끄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보편적인 위로라는 이름의 기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위로와 해석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이제 인류는 직접 메스를 들고 상처의 근원을 도려내어 문제를 해결할 집도의 시간에 이르렀습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