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5년 전 20대 중반 즈음. 나는 직장 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나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난 왜 사나?"라는 깊은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
하던 일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고, 그 어떤 즐거움 또는 작은 보람조차 없었다.
더 이상 그렇게 버틸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는 내가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한 발악 같은 노력을 했다.
다행히도, 나는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 분야에서 새로운 직장을 찾았다.
직장에서의 일이 너무 재밌어서, 주말도 반납하고 일했다. 처음 느껴보는 "일이 즐겁다"라는 감정이었다.
나는 그렇게 내가 "사는 이유"를 찾았다.
20대 후반. 나는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될 사람을 만났다. 연애가 늘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이 사람이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아주 큰 안정감을 가져다 준 것은 확실하다.
이제 나는 30대 초반이 되었다.
즐거운 일을 할 수 있었던 직장에서는 여러 이유로 떠나게 되었고, 새로운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직장은,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은 되지 못한다. 20대 중반 내가 그토록 바랬던 일이 즐겁다거나 보람이 느껴진다는 감정을 느끼지는 못한다.
그런데 나는 사실 살만하다.
20대 중반에는 그토록 괴로웠던 "일이 보람차거나 즐겁지 않은 삶" 이, 지금은 왜 괜찮다고 느껴지는 걸까?
1942년, 유대인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되어 3년 동안 극한의 생활을 했다. 프랭클은 수감소에 수용될 당시 첫 저서로 출간할 초고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그 원고가 영혼의 분신과도 같았다. 그에게는 자신의 영혼을 담은 저서를 출간하는 것이 삶의 의미였다. 그런데 그는 그 원고를 압수당하게 되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기로에 섰다.
그때, 그는 어떤 수감자의 옷 주머니 속에서 찢어진 기도문 조각을 발견했다.
"진심으로 네 영혼과 힘을 다하여 너의 주를 사랑하라"
프랭클은, 이를 고통이나 심지어 죽음이 닥치더라도 삶을 긍정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 이후 프랭클은 본인이 목숨처럼 여기던 원고를 잃어버렸지만, 새로이 접한 기도문이 그의 삶에 새 의미가 되었다.
20대 때는, 내가 "잘하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살아가는 이유가 없기에, "잘하는,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보면, 지금의 나는 "살아가는 이유"가 다른 곳에서 충족이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루, 한 달, 일 년, 평생을 함께하는 것이 이제 나에게는 하루를 살아가는 이유이다. 때문에, 직장에서 굳이 "살아가는 이유"를 찾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다.
마치, 프랭클의 "살아가는 이유"가 자신의 영혼을 담은 저서를 출간하는 것에서, 어떤 고통이 닥치더라도 긍정하라는 계시를 따르는 것으로 변화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