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갑질피해자입니다.

by 케빈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에 왠지 모를 행복이 비치는 연말이었습니다. 연인들은 백화점에 장식된 트리에서 아이들은 장난감 가게에서 한껏 들뜬 모습이, 고개만 돌려도 보이는 그런 축제의 계절이었습니다. 그런 계절에 저는 대형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습니다. 병원로비에서 조차 수백 개의 전구로 장식된 트리가 저를 보며 불쌍한 표정을 짓는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진단명은 적응장애. 이사, 실직, 가족갈등, 질병, 직장 내 스트레스 등으로 사건을 겪은 후 3개월 이내에 나타나는 정서적. 행동적 어려움으로 우울, 불안, 무기력, 집중력 저하, 불면 등의 증상을 나타내며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상태의 병을 말한다고 합니다. 가뜩이나 잠을 유지 못하는 예민한 성격에 직장 상사의 폭언이 더해져 불면의 밤은 더욱 깊어갔습니다.


폭언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요즘 ㅇㅇ씨 하는 게 뭐가 있어요?"


막막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출장에 강의에 내가 올린 결과보고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또 말했습니다.


"일상적으로 하는 건 일이 아니에요. 그건 숨 쉬듯 해야 하는 일들이고, 제도를 바꾸고 한 발 더 나아가는 일. 그게 일이지. 그런 일 ㅇㅇ씨가 한 거 없잖아요."


이 말에 저는 아무것도 안 하는 직원이 되어 버렸습니다. 폭언은 다음날도 이어졌습니다.


"ㅇㅇ씨가 작성한 문서는 초등학생보다 못한 문서예요. 말이 안 맞아요. 여기서 갑자기 왜 이런 말이 나오는데요. 대책을 얘기한다 해 놓고 똑같은 문제를 한 번 더 제기할 뿐이잖아요."


2개월 전에 보고한 문서가 초등학생이 작성한 수준의 문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동안 한 번의 피드백도 없다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제 문서는 펜으로 칼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고치는 것이 아닌 문서 전체에 대한 지적이었고 처음부터 다시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였습니다.


"팀장님. 제가 팀장님의 요구를 한 번에 충족시키진 못할 거 같습니다. 다음 문서도 아쉬운 부분이 있을 거 같은데 좀 도와주시십시오."


별 말이 없이 다음 회의가 이어졌습니다.


"자 이제 내년도 업무계획을 작성하겠습니다. 이건 별도의 지시는 없었는데. 앞으로 제가 업무를 좀 챙길 거 기 때문에 작성해 보는 거고요. 이건 보자.. 오늘이 금요일이니. 월요일까지 작성하는 걸로 할게요."


보다 못한 팀장의 상급자가 나섰습니다.


"아니 팀장님 지금 팀원들 숙제가 한가득인데, 오늘 금요일이고. 이걸 월요일까지 하라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안됩니다. 쪼아야 됩니다." 이 말을 하면서 그는 웃고있었습니다.


가슴에 얹힌 무거운 바위 위에 새로운 돌이 하나 더 올려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먼저 얹혔던 돌도 크고 무거웠는데 다음번에 얹힌 돌은 작았지만 그 무게는 큰 돌과 더해져 더 제 가슴을 갑갑하게 만들었습니다. 팀장과 팀장의 상급자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제 손에서는 땀이 멈출 줄을 몰랐고 얼굴은 계속해서 화끈거렸습니다.


새로 작성한 문서를 검토받는 날. AI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맥락과 요지를 수정했고 오탈자도 꼼꼼히 살폈습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생각하고 저는 회의장소에 앉았습니다. 먼저 후배가 작성 중인 문서를 1시간에 걸쳐 검토했고 제 차례가 다가왔습니다. 팀장은 '공무원 행정업무 운영편람'을 꺼내 들었습니다.


"제목 밑에 요약칸은 왜 만드는거에요? 추진배경과 경과가 있는데. 배경은 뭐고 경과는 뭐에요?"


"공무원은 문서가 기본이에요. ㅇㅇ씨 문서 작성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거 같은데..."


저는 무언가 또 잘못되었다 싶었습니다. 손이 떨리고 그 손에서 땀이 쉴 새 없이 났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두 눈은 책상에 떨구고 말했습니다.


"팀장님 이번 문서는 제가 숙고해서 만든 건데 아직 많이 모자란 거 같습니다. 어느 부분을 고쳐야 될지 좀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요 이건 처음부터 잘못된 문서라 고쳐줄 수가 없어요. 단어도 안 맞고 개요도 다 틀렸어요. ㅇㅇ씨 스펙 좋잖아요. 근데 이 정도밖에 안돼요?'


그리고 제 가슴에 못을 박는 그의 한마디.


"이 정도 스트레스도 못 받을 거면 회사 나가세요."


그즈음 이르니 저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부탁을 했습니다. 지난 한 주간에 걸쳐 우리가 여러 번의 회의를 하고 있으며 회의 때마다 나온 내용을 문서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아직도 팀장님의 기준에 맞지 않는 거 같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를 좀 도와주시면 안 되겠냐. 문서를 만들어 달라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이 저는 너무 무섭고 당황스럽다. 우리가 하는 일의 목적이 상부 보고에 있다면, 그리고 기한에 맞춰 보고를 드려야 한다면. 문서 검토는 이쯤에서 끝내고 세부적인 부분을 고치는 방향으로 할 수 있게 저를 좀 도와주시면 안 되나.


그리고 돌아온 한마디


"아니요, 못 도와줘요."


2025년 연말. 저는 그렇게 회사에 출근 한 채 눈뜬 악몽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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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0일

첫 번째 문서 보고

1. ㅇㅇ씨 지난 1년간 뭐 했는데요? 기본적으로 하는 일 말고 제도를 바꾸거나 우리가 하는 일을 한 발 더 나아가는 그런 일 한 거 없잖아요. 출장 가고 점검 가고 하는 건 숨 쉬는 일처럼 해야 되는 거고.


2025년 12월 0일

두 번째 문서 보고

2. ㅇㅇ씨가 작성한 문서는 초등학생 수준이에요.

나의 행동: 대장에게 면담 요청


2025년 12월 0일

대장의 주선으로 팀회식


2025년 12월 0일

대장 주관 팀회의


2025년 12월 0일

팀장 주관 팀회의. 세 번째 문서 보고

3. ㅇㅇ씨 우리 팀 맞아요? ㅇㅇ씨 일만 하려고 선 딱 긋고 이 쪽 일은 전혀 안 도와주던데

4. 이 정도 스트레스도 안 받을 거면 회사 나가세요.

5. 저는 못 도와줍니다.

6. ㅇㅇ씨가 작성한 문서는 초등학생 수준도 못되요. 그 이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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